영화에서처럼 박중훈(36)은 사람들을 즐겁게 할 줄 안다. 그것도 재미나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는 것으로. 불만이나 부끄러움을 이야기할 때도 그의 화법은 유머이다. 심각한 것일수록 장난기 가득하게, 강한 주장일수록 아주 재치 있는 비유를 든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을 무장해제시키고 나면 그때서야 슬슬 그는 자기 주장을 풀어놓는다. 때론 눈물로, 때론 솔직한 심경고백 형식으로. '찰리의 진실' 국내 개봉을 앞두고 만났을 때도 그랬다.만나자마자 대뜸 혼잣말처럼 "아이, 나는 이런 영화에 이제 출연하지 말아야 돼"라며 엉뚱한 곳을 본다. 물론 웃음기 잔뜩 머금은 얼굴. 10월 미국에서 개봉해 첫 주말 박스오피스 14위에 머물자 '흥행에 실패했다'고 쓴 한국일보 기사(10월 31일자 47면 보도)를 두고 하는 말이다. 무척 서운했나 보다. "충무로 영화라면 내게 모든 흥행 포인트가 있고, 출연료도 내가 제일 많이 받으니 내 책임이지만 이 영화는 그게 아니잖아요. 주연을 맡은 마크 왈버그가 원망스럽더라구요. 신인이라면 그냥 배짱으로 덤비면 되는데, 난 그게 아니잖아요. 명색이 한국을 대표하는 배우인데. 촬영 내내 한국에서 상영될 때를 생각했습니다. "
박중훈은 선동렬이 미국 메이저리그에 가서 공을 던지는 것과 같은 상황으로 비유했다. 아무리 스타라도 그 쪽에서는 신인이다. 때문에 '저거 하려고 미국 갔나'하지 말고 마이너리그 취급도 않는 한국에서 온 그 신인이 처음으로 그것도 32만5,000달러라는 적지 않은 돈을 받고 연기를 했다는 점을 평가해 달라고 했다.
그의 표현대로 '넘버3'의 딱 송강호 같은 조연을 하면서 어찌 설움이 없었으랴. '세이 예스' 촬영이 늦어 부랴부랴 도착한 파리에서의 그의 첫 대사연습을 듣고 얼굴이 '똥빛'이 된 프로듀서, 보다 못해 그를 조용히 불러 무조건 "열심히 하라"만 반복하는 감독. 마크 왈버그와 배우 휴게차(트레일러)는 물론 그 안의 냉장고 크기까지 다른 것도 자존심을 건드렸다. "한국에서는 모든 스케줄이 나 위주인데. 모든 게 정반대였다. 주연배우 스케줄에 맞춰 10시간 기다렸다 한 컷 찍는 일이 허다했다."
그럴수록 그는 한 컷이라도 이를 악물고 뛰었다. 얼마나 이를 물었으면 5개월 촬영이 끝나고 보니 앞니가 0.5㎜ 내려앉아 교정까지 했다. "트레일러 출입문에 배우 박중훈이 아닌 이일상이란 배역 이름을 붙여놓았었죠. 처음 대본의 오사다란 일본 이름을 내가 바꾼 것입니다. 일상은 3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 함자이고, 성은 이명세 감독 것을 땄습니다. 누구보다 나의 할리우드 진출을 기뻐하실 아버지를 하루도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왜 꼭 할리우드로 진출을 하려는 걸까. "세계 관객과 만나는 것은 배우의 꿈이죠. 18년 동안 30편을 하면서 이제 국내 관객에게는 수도 읽혔고, 식상해지기도 했습니다. 마이너리티로서 한계는 있겠지만 그래도 저우룬파(周潤發)이나 안토니오 반데라스 정도까지는 가 봐야죠."
가능성은 열려있다. '찰리의 진실'로 그는 5편에 출연제의를 받았다. 그런데 모두 거절했다. "닉 놀티 주연의 액션영화에서 악역 아니면 이유 없는 조연들"이었기 때문이다. 대신 '찰리의 진실' 의 프로듀서인 피터 새러프가 내년 가을쯤 메이저영화로는 초저예산으로 만들 동양남자와 서양여자의 로맨틱 코미디 '비빕밥'에 주연을 맡기로 했다.
'메이저 영화에서 의미있는 조연, 아니면 B급 영화 주연' 이란 원칙으로 박중훈은 이제 할리우드로 나아가고 있다. '찰리의 진실'은 그 첫 발이다.
/이대현기자 leedh@hk.co.kr
● "찰리의 진실"은 어떤 영화
조너선 드미 감독의 '찰리의 진실'(The Truth About Charlie)은 스탠리 도넌 감독의 1963년작 '샤레이드'의 리메이크. 남편의 죽음 이후 남편이 숨겨둔 돈 때문에 목숨을 위협 받는 여주인공이 비밀요원의 도움으로 사건을 해결한다.
리메이크에서는 귀여운 오드리 헵번 대신 이국적인 느낌의 흑인 배우 탠디 뉴튼이 레지나 역을, 헵번과는 부녀지간처럼 나이 차이가 많이 났던 캐리 그랜트 대신 '혹성탈출'로 인기 배우로 부상한 마크 왈버그가 연인이자 적, 조슈아로 나왔다.
박중훈이 맡은 이일상은 전작에서 제임스 코번이 맡았던, 죽은 남편의 옛 동료 텍스 역. 박중훈은 영화에서 네 번째로 이름이 올라가는 조연이지만 감독의 사랑이 각별하다. 조슈아와 이일상이 파리 시내를 질주하는 장면,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골목길에서 대치하는 장면 모두 '인정 사정 볼 것 없다'(감독 이명세)의 패러디이고, 에필로그 장면에서 보이는 박중훈의 장난스런 표정은 그를 위한 별책부록. 전작에서 제임스 코번이 악당으로 죽어간 데 반해 이일상은 중요한 반전의 열쇠를 쥔 인물로까지 변신했다. 현란한 카메라 워킹과 이국적인 음악, 그리고 유머를 더욱 곁들인 독특한 리메이크 영화로 프랑수아 트뤼포의 '피아니스트를 쏴라'에 출연한 가수이자 배우인 샤를르 아즈나부르(78)가 CD에서 튀어나와 노래를 부르는 장면 등을 통해 누벨바그에 각별한 애정을 표했다. 바로 이 점이 대중적 범죄 영화로서는 한계로 보인다. 12세가. 1월10일 개봉.
/박은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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