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늘 부족한 살림에 내세울 것도 없지만, 그래도 남에게 해코지 않고 성실하게 살아온 60대 중반 '서민' 가장입니다. 그런데 늘그막이 되니 없다는 사실이 서럽군요. 네 남매는 사업하겠다, 이사하겠다며 찾아와 돈타령하다가 어디에서도 돈 나올 구석이 없으니 아비를 원망합니다. 이럴 때면 '정말 내가 평생 잘못 살아왔구나' 하는 자괴에 빠지지요. 자식들에게 바른 정신과 가치를 심어주었다고 여겼는데, 막상 자식들이 원하는 것은 가진 부모였습니다. 저 역시 앞날을 따져보니 새삼 물신을 섬기지 않았음이 후회됩니다. (서울 안국동 차씨)
답>평생 사회 지도층 자세로 서민생활을 해오시다 노년을 맞아 좌절하시는 모습을 뵈니 가슴이 아픕니다. 선생 세대는 집과 이웃, 학교에서 받은 도덕심을 기본으로, 가난을 딛고 우리사회와 국가를 건설한 세대이십니다. '일 중독' 세대였지요. 선생과 다르게 자립심이 부족한 자식들에 실망하시고, 한편 그들 요청에 부응할 처지가 못 되는 선생 자신에게도 분노하고 계시는군요.
그러나 자식의 사업자금이나 집 늘릴 돈을 대주는 부모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가부장적 문화 때문에 부모 자식간의 의존도가 서양보다 더 강하다 하더라도, 우리 사회에 돈이 더 많아졌다 하더라도 그런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부모는 극소수입니다. 혹시 평소 당당한 선생의 태도가 자식들에게 숨겨놓은 재산이 있을 것이라는 오해를 사게 한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실상을 알아차리는 순간 실망이 더 커진 것은 아닐까요?
설사 있는 부모라도 덥석 도와주는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자식들이 안간힘을 써서 스스로 일어나기를 지켜보다가 막판에 가서야 도와주지요. 그러니 선생께서는 미안해 하실 것 없습니다. 아마도 자식들의 '속았다'는 원망소리가 선생의 높은 자존심에 상처를 주었으리라 판단이 되는군요.
실상을 파악한 이상 자식들은 더 이상 요구해오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이제부터 진정으로 '없으면서도 당당했던' 아버님을 존경하게 되고, 자신들도 자식을 그렇게 키울 것입니다.
선생 세대는 우리 평균수명이 이렇게 늘어 날 줄 몰랐지요. 노후가 길어지니 멋모르고 자식을 도와주다가는 뒤에 자식에게 의탁하게 됩니다. 노후일수록 돈이 더 필요하지요. 그래서 선생의 뒤늦은 후회가 이해가 갑니다.
/서울대 의대 신경정신과 dycho@dych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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