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1993년 11월 14일 작고하기 전까지 두달 여의 기간을 서울대병원 9층의 병실에서 보냈다. 이제는 병원을 나가지 못할 거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았을 아버지가 그나마 소일거리로 택할 수 있었던 것은 스케치북에 간단한 그림들을 그리는 것이었다."고고학자 삼불(三佛) 김원룡(金元龍·1922∼1993) 박사의 아들 김종재 서울의대 교수는 아버지가 그린 '북한산 줄기'라는 그림을 이렇게 설명했다. '93.10.5 서울대병원 9112호실'이라는 날짜·장소와 사인이 들어있다. 죽음을 앞둔 한국 고고·미술사학계의 태두가 병실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종이에 펜으로 그린 그림은 소박하고 간결한 필치로 우리 전통 문인화의 기품을 살리고 있다.
이 그림은 김 교수가 가나아트센터가 신년 기획전으로 준비 중인 '나의 애장품' 전에 출품키로 한 것. 애장품이란 단지 비싸고 좋은 것이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그것을 소중히 여길 때 비로소 향기를 발하는 소박한 물건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소장품들이 한 자리에 모인다. 문화예술계 명사 50여 명이 보여줄 120여 점의 애장품을 미리 만나보았다.
세밑에 백남준씨가 이어령씨에게 보낸 연하장을 보는 것도 흥미롭다. 마침 올해와 같은 말띠 해에 보낸 연하장이다. 백씨는 달력 칸칸에 새 과일 풍선 자전거 등을 드로잉하고 그 위에 특유의 어린아이 같은 필치로 '말(言)' '말(馬)' 등의 글씨를 적어놓았다. 이어령씨는 "우리나라의 말(言)은 말(馬)과 같다. 백남준이 내 이름 어령(御寧)의 '御' 자가 말(馬)을 제어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 내가 달리는 말(馬)을 다루는 사람이고 그 말은 말(言)과 같으니 언어를 다스리고 다루는 사람으로 풀이했다"며 이 연하장을 늘 가까이 두는 '백남준식 이어령론'이라고 말한다.
김형국 서울대 교수는 화가 장욱진(張旭鎭·1917∼1990)의 자화상을 출품했다. 김 교수가 1986년 고인의 고희 때 전기에 쓸 자화상을 부탁하자 그 자리에서 지필묵을 꺼내들어 일 분도 안돼 그렸다는 그림이다. "그림이란 군말 필요 없이 '보고 좋으면 그만'이라 했던 직관과 직정(直情)을 중시하는 순수주의자였던 당신의 면모를 알 수 있었다"고 김 교수는 돌아본다. 장욱진, 김환기 화백의 그림은 김 교수 외에도 궁중요리가 조후종, 만화가 박수동씨도 애장품으로 내놓아 이들이 '국민 화가'임을 새삼 입증했다.
영화감독 유현목, 화가 박근자씨 부부는 "역마살을 다스리기 위해 소장한다"는 '말안장'을 내놓았고, 허동화 한국자수박물관장은 "액을 물리치기 위해 호주머니에 남몰래 숨겨 들고 다녔다"는 '호랑이 어금니'를 보여주는 등 흥미로운 출품작들도 많다. 전시는 1월 10일부터 2월 2일까지 열릴 예정이다. 문의 (02)720―1020
/하종오기자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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