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 이후 한국 경제는 외국에 문을 활짝 열었다. 특히 금융분야의 개방은 매우 빠르게 이뤄졌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경제는 대외적으로 '폐쇄적'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노무현 당선자는 공약에서 '허브 코리아(동북아 중심국가)' 건설을 위해 한반도가 세계를 향해 전면적으로 열린 '개방형 국토'로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중·일 동북아 협의체 구성, 자유무역협정(FTA)의 적극 추진 등 개방을 통한 경제구조 선진화를 내세우고 있다.그러나 후보시절 노 당선자의 개방에 대한 발언들은 일관성이 없었다. "2004년 쌀 개방 재협상에서 관세화(개방) 유예를 관철하겠다"고 했다가 나중에는 "개방에 대비해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물러선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차기 정부는 당장 2004년 말 타결을 목표로 하는 세계무역기구(WTO) 도하개발아젠다(DDA) 협상이라는 중차대한 협상에 직면하게 된다. 공산품과 서비스, 농산물 등 모든 부문에 걸쳐 개방의 폭과 범위, 일정 등을 놓고 힘겨운 줄다리기를 해야 한다. WTO 다자협상의 다른 한편에선 우리와 경쟁관계에 있거나, 우리의 주요 시장인 나라들 사이에 FTA를 통한 블록화 추세가 강화하고 있다.
이처럼 중요한 시기를 담당할 노무현 정부는 개방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정리해야 한다. 중장기적인 전략과 비전을 세우고 능동적으로 대세를 주도해야 한다.
▶전략적으로 접근하라
현 정부는 개방정책을 과거 어느 정부보다도 의욕적으로 추진해왔다. 동북아 경제협력체 방안을 먼저 주창했고, 한·칠레 FTA 타결로 'FTA 외톨이'라는 오명도 벗었다. 하지만 여전히 한국 경제가 폐쇄적 이미지를 벗지 못하고 있는 것은 '총론'과 '각론'이 다르기 때문이다. 명분상 개방을 강조하고 때론 먼저 협상을 제의했지만 막상 협상에 임해서는 소극적, 방어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노 당선자의 후보시절 발언은 이런 고민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대외 명분과 대내 현실 사이의 괴리에서 중심을 못잡고 흔들리는 것이다.
거센 물살을 거스를 수 없다면 흐름에 몸을 맡기고 살 궁리를 해야 한다. 공연히 발버둥치면서 힘을 뺄 이유가 없다. 최낙균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무역투자정책실장은 "2010년, 혹은 2015년쯤에는 시장이 완전 개방된다고 보고 대비를 해야 한다. 농업 등 취약한 산업에 대해서는 구조조정과 경쟁력 강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사안별 땜질식 처방이 아니라 개방에 대한 중장기 전략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선진국과 개도국, 중국과 일본 사이에 위치한 우리나라는 DDA 협상과 동북아 FTA 추진에서 '적극적 중간자' 역할을 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박태호 서울대 국제지역원장은 "개도국에 대해서는 개방을 적극 설득하고, 선진국에 대해서는 '개도국 지원을 통한 개방 유도'를 설득함으로써 개방에 대해 능동적인 이미지를 심어야 한다"며 중간자로서의 생산적 역할을 강조했다. 동북아 FTA에 대해서도 "한·일 먼저 하고 중국은 나중에 참여토록 하는 게 현실적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선진국의 블록화 추세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같은 차에 태우는 게 좋다"며 "한국이 두 나라의 중간자 역할을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노 당선자측은 '동북아 중심국가 도약'을 중요한 정책 목표로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동북아 중심국가는 도로 항만 공항 등 인프라만 확충한다고 해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개방성이다. 생활환경과 문화는 물론이고, 비즈니스 환경이 개방적이어야 한다. 따라서 한·중·일 FTA 체결은 동북아 중심국가 전략의 전제 조건이라 할 수 있다.
▶이해조정으로 공감대 이뤄야
개방이 불가피한 추세라 하더라도 국민의 공감대 없이는 불가능하다. 외교통상부 관계자는 "상대국과의 협상보다 관련부처 및 이익단체와의 조율이 훨씬 어렵다"며 "차기 정부에선 이해당사자들의 의견을 조정하는 제도적 장치를 보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통상조직의 전면적인 개편보다는 조정기능의 강화쪽에 무게를 두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개방에 따른 농업 등 취약분야의 구조조정과 경쟁력 제고를 위한 지원대책도 제도화해야 한다. 사안이 벌어질 때마다 불만을 무마하는 식의 대증적 처방으로는 효율적인 개방대책을 세울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노 당선자측이 'FTA 추진·이행에 관한 특별법'(가칭)을 제정하겠다는 방침을 세운 것은 옳은 방향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농어민 부채경감 대책과 같은 일방적 지원책은 구조조정을 저해하고 자생력을 떨어트릴 수 있다는 점에서 논란의 소지가 있다. 김경원 삼성경제연구소 상무는 "개방이 대세이긴 하나 식량안보 등 여러 측면에서 농업을 포기할 수는 없다. 결국 경쟁력 강화가 관건인데, 당장 돈을 쏟아 붓는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농업을 산업으로 인식하고 벤처마인드로 경영한다면 충분히 희망이 있다"고 말했다.
/김상철기자 sc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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