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2월, 대학 졸업식이 얼마 남지않은 어느 날 서울에서 아버지의 부음을 들었다. 지방 공무원이셨던 아버지는 3남매를 공부시키다 지쳐 쉰을 넘기지 못하고 돌아가셨다.아버지 시신을 모신 병풍 앞에서 스물네살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가족사의 발전을 위한 이어달리기에서 너무 일찍 바통을 받았지만 이제부터는 외아들인 내가 힘차게 달릴 수밖에 없다고. 어쩌면 그 날 밤의 각오가 3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건축가로서의 인생을 달려온 힘의 원천이었는지 모른다. 모교의 건축과 후배인 아들놈에게 그 날 밤의 잊지 못할 결심과 함께 다시 바통을 넘겨야 할 날을 기다린다.
86년 5월 어느 날, 스승 김수근 선생님이 간암으로 돌아가시기 한달 전, 마지막으로 회사에 오신 선생님께 나는 어리석게도 회사의 경제적 어려움을 말씀 드렸다. 그 때 스승께서는 조용히 메모지에 이렇게 쓰셨다. '건축이 Richness야.'
이것이 무슨 말씀인가, "건축이라는 창조적 일에 몸담고 있는 그 자체가 풍요로운 부(Richness)가 아니냐, 너는 뭐 그 따위 경제적인 부에 매달려 있느냐!"는 일갈이었다. 그 말은 나에게 쇼크였다. IMF의 처참한 위기 때도 나는 내가 하고 있는 건축설계라는 창조적인 일 자체가 아름답고 가치있는 풍요로움이라 믿고 견딜 수 있었다.
88년 12월,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기술적 혁신을 이룬 아름다운 하이테크 건축'에 주는 쿼터나리오 국제건축상 시상식에서, 먼저 은상이 확정된 5명의 건축가가 소개되었다. 홍콩의 상하이 뱅크를 설계한 최고의 건축가 영국의 노만 포스터경, 2000년 시드니 올림픽 건축을 주도한 호주의 필립 콕스 등과 88서울올림픽 체조경기장을 스승인 고(故) 김수근 선생님과 공동 이름으로 출품한 내가 있었다. 마침내 최종 금상 수상자로 내 이름이 호명되고 상장과 트로피를 받는 순간, 다시한번 김수근 선생이 건네신 그 말씀이 귓전에 울렸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98년, 서울월드컵 경기장 턴키 현상설계에 당선되는 영광을 안았다. 4년동안 겪었던 온갖 어려움은 지난 6월의 함성으로 보상 받았다. 2002년 월드컵은 내 평생 못 잊을 일의 결정판일 수 있다. 10년전 돌아가신 어머니께 보여드리지 못함이 한스럽다. 훗날 '내 평생 잊지 못할 일'을 다시 쓰게 될 때, 또다른 새로운 일을 기억하게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류 춘 수 이공건축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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