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대선은 선거자금 규모나 투명성 면에서 15대 대선에 비해 진일보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수천억원의 선거자금이 투입되고 수만명의 청중이 동원돼 흥청망청하던 선거판 풍경은 일단 자취를 감추었다. 미디어 선거 여파로 돈과 조직을 이용한 선거 관행이 크게 퇴색했다는 게 정당 관계자들의 공통된 견해다.그러나 조금 더 깊이 들여다 보면 청중동원식 조직 선거가 여전히 횡행하고 물밑에서 움직인 돈도 상당한 규모인 것으로 알려졌다.
또 지역의 유력인사가 판을 좌우하는 총선이나 지방선거와는 양상이 다른 대선을 기준으로 돈 안드는 선거가 뿌리내렸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지적도 많다.
이번 대선의 중요한 특징은 기존의 조직·청중 동원 선거 대신 TV 등 대중매체와 인터넷을 이용한 미디어 선거가 자리잡았다는 점이다. 동원된 청중 자체가 크게 줄었다. 12일 한나라당의 부산역 집회에 모인 1만5,000명이 최대 기록이며 대부분의 유세에는 2,000∼3,000명 정도의 청중이 고작이었다. 200∼300명이 모인 소형 유세도 허다했다.
과거 선거에서 동원청중에는 3만∼5만원의 일당이 지급됐다. 지구당 조직을 통해 수만명의 청중을 동원하려면 천문학적 자금이 들어간다. 그러나 대규모 집회가 자취를 감추자 청중동원에 쓰는 자금이 크게 줄었다.
민주당 관계자는 "97년 대선에서는 최소 1,000억원을 쏟아 부었지만 이번엔 300억원대로 준 것 같다"며 "지구당 지원자금도 1,000만∼2,000만원씩에 불과하다"고 귀띔했다. 선거자금 규모는 정당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한나라당도 3분의 1 수준으로 줄었다고 밝히고 있다.
특히 민주당이 보여준 미디어 선거 행태는 "미디어가 정치를 바꿨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큰 위력을 발휘했다. TV 광고와 찬조 연설, 인터넷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 20·30대의 감성을 겨냥한 민주당의 '공중전(空中戰)'은 조직 중심의 '지상전(地上戰)'에 치중한 한나라당을 압도했다.
선거비용 항목도 크게 달라졌다. 과거 주종을 이룬 조직 가동비와 청중 동원 비용은 눈에 띄게 줄고 신문·방송 광고비와 차량 대여비 등 미디어 관련 비용이 크게 늘었다.
그러나 이런 변화가 돈과 조직에 바탕한 전통적 선거문화를 근본적으로 뒤바꾸기에는 아직 역부족인 것으로 지적됐다.
대선유권자연대 김기현(金起鉉) 간사는 "일부 정당은 누락·은폐된 선거비용이 신고액보다 큰 것으로 추정된다"며 "법정 선거기간 이전에 쏟아 부은 비용까지 합칠 경우 실제 선거비용은 발표된 비용의 2∼3배에 달할 것"이라고 밝혔다.
장달중(張達重) 서울대 교수는 "돈과 조직 선거가 일시 퇴조했지만 정치 패러다임의 변화로 보기에는 한계가 있다"며 "공천 및 당선 과정에 거액이 들고 미디어 대신 지역 유력자가 판세를 좌우하는 총선과 지방선거에서도 돈 안드는 선거가 가능할지는 미지수"라고 신중론을 폈다. 그는 또 "20대의 투표율이 48%에 그친 점도 제약 요인"이라며 "제도적 개선과 함께 유권자의 의식혁명이 뒤따라야 한다"고 강조했다.
선거비용의 투명성을 높이고 법적·제도적 개선책이 뒤따라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대선유권자연대 상임집행위원장 박원순(朴元淳) 변호사는 "100만원 이상의 지출에는 수표나 신용카드 사용을 의무화하고, 후원금 기부자 등 수입내역도 공개해야 한다"며 "당내 경선 등 공식 선거운동기간 이전의 지출도 선거비에 포함시키고 인터넷 선거운동을 활성화해야 돈 안드는 선거 혁명을 이룰 수 있다"고 제안했다.
/배성규기자 veg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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