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5월 모나미 153 볼펜이 양산되기 시작하면서 우리 기술, 우리 부품으로 볼펜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은 더욱 확고해졌다. 볼펜이 많이 팔리는 만큼 일본으로 유출되는 외화 액수도 커졌고, 그것은 고스란히 소비자 부담이 되고 있었다. 또 언제까지 일본 기술과 부품에 의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일본의 오토 볼펜이 유성잉크 배합 기술을 전수해줬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모나미에 핵심 부품인 팁(Tip)을 팔기 위한 전략일 뿐이었다. 유성잉크 배합 기술은 경험이 쌓이면 일본 수준까지 도달할 수 있지만 팁의 국산화는 제조기계 없이는 불가능했다. 나는 팁 제조기계(SPM)를 사기로 결심했다. 오토 볼펜 공장에 있던 SPM의 생산업체는 스위스의 아르베사였다. 나는 아르베사에 SPM 구입 가능 여부를 타진했다. 며칠 뒤 아르베사로부터 회신이 왔다. 하지만 한국의 작은 회사 광신화학은 믿을 수 없어 SPM을 팔 수 없다는 답변이었다. SPM은 당시 돈으로 대당 3만 달러나 하는 고가의 정밀 기계였다. 미국 트라이마크에 물감 크레파스 5만 달러 어치를 판 것외에는 수출입 이력이 없으니 믿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한번 결심한 일은 반드시 해내고야 마는 것이 내 성격이었다.
아르베사로부터 보기좋게 SPM 구입을 거절당한 나는 즉시 일본 도쿄(東京)로 갔다. 스위스 아르베사의 극동 대리점 역할을 하고 있는 곳이 일본의 니치멘(日綿) 상사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니치멘 상사 관계자를 만나 SPM을 구입하고 싶다는 뜻을 전달했다. 그러자 니치멘 상사측은 보증금 100만엔을 요구했다. SPM 구입대금을 제대로 결제하지 못할 경우에 대비하겠다는 것이었다. 당장 지갑에 100만엔이나 되는 거금이 있을 리가 없었다. 회사에 연락해서 돈을 송금받으려면 서류를 꾸미고, 당국의 승인을 받아야 했는데 며칠이 걸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궁즉통이라고 했던가. 나는 광신산업의 염료 수입선이던 스미토모(住友) 상사로 달려갔다. 광신산업이 스미토모 상사의 한국 총대리점이었기 때문에 스미토모 상사는 나를 무시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스미토모 상사에서 나는 저간의 사정을 얘기하고 100만엔을 빌려 니치멘 상사에 보증금을 낼 수 있었다.
그로부터 한달여 뒤인 1964년 4월 스위스로부터 SPM이 도착했다. 100%는 아니지만 마침내 볼펜 국산화를 위한 큰 걸음을 내딛을 수 있게 된 것이었다. 흥분된 마음에 직원들이 기계 포장을 뜯으려고 하자 뒤에서 "오, 노"라는 외마디 비명소리가 들렸다. SPM 설치를 위해 스위스 아르베사로부터 파견된 기술자 에그린(Eglin)씨의 목소리였다. 그는 직원들을 저지하면서 내게 서류 한 장을 보여줬다. SPM의 포장 해체 및 설치, 그리고 시험 가동 및 본격 가동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아르베사가 파견한 직원이 처리해야 하며, 이를 어길 경우 아르베사는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에그린씨는 다른 직원들의 접근을 차단한 채 혼자 SPM 설치 작업에 착수했다. 에그린은 훗날 모나미가 최대 위기를 맞았을 때도 혈혈단신 한국으로 날아와 모나미가 위기를 극복하는 데 크나큰 도움을 주게 된다.
잠시 지면을 빌려야 하겠다. 지난 24, 25일 연재한 '크리스마스의 추억' 편에서 송병순 전 행장과 내가 부산에서 함께 보낸 시절의 에피소드를 적었는데 본의 아니게 송 전 행장 부부께 누가 된 것 같다. 정중하게 사과드린다. 마침 크리스마스여서 전쟁통에 피난지에서 타향살이를 하던 20대 젊은이들의 낭만과 추억을 이야기하려던 것이었다는 점을 이해해주시길 바란다.
12월24일자 <29>회를 <28>회로 잘못 표기, 25·26·27일자 연재 회수가 잇따라 틀렸기에 각각 <30>·<31>·<32>회로 바로 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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