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홉스봄 지음·강성호 옮김 민음사 발행·2만원이 시대 최고의 역사가를 꼽을 때 빠짐없이 거론되는 이가 영국의 좌파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85·사진)이다. 그는 프랑스 대혁명(1789)에서 옛 소련의 몰락(1991)까지를 다룬 '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 '극단의 시대' 4부작 등을 통해 역사학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현재도 영국과 미국 학술원 회원, 뉴욕 신사회조사연구원 교수로 재직하며 활발한 저술·강연 활동을 펼치고 있다. 홉스봄이 자신의 역사 인식과 역사학 방법론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역사론'(원제 'On History'·1997)을 강성호 순천대 사학과 교수가 완역, 출간했다. 이 책에는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1917년에 태어난 그가 '극단의 시대'라고 이름 붙인 격동의 20세기를 걸어온 삶과 사상의 궤적이 그대로 녹아있다. 주제는 무겁지만 21편의 글 대부분이 강연을 바탕으로 쓴 것이어서 일반인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홉스봄은 먼저 날조된 역사의 폐해를 지적한다. 1947년에야 국가로 탄생한 파키스탄이 인더스 문명을 끌어대 '파키스탄 5,000년사'를 말하고,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 이스라엘의 건국과 팔레스타인 탄압을 정당화하는 구실로 악용되고, 일본의 침략전쟁이 미화된 채 교과서에 실리는 등 그가 드는 사례는 끝이 없다. 저자는 "(민족과 민족주의라는) 눈가리개를 없애려고 시도하는 것, 혹은 적어도 눈가리개를 조금 들어올리거나 이따금 들어올리는 것이 역사가의 직무"라고 말한다.
홉스봄은 과거의 해석에 머물렀던 역사학의 지평을 미래에 대한 예측까지로 넓힌다. 그는 1980년 6월의 한 사건을 예로 들어 "역사적 통찰을 바탕으로 미래를 예견하는 것은 가능하고, 필요한 일"이라고 역설한다. 당시 미국 핵 관제 시스템에 소련 핵미사일로 보이는 물체가 탐지됐다.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 다행히 기계 오작동으로 판명돼 위기는 해소됐지만 과연 인류의 미래를 컴퓨터의 오류 자동확인 장치에 맡길 것인가 하는 근본적 물음을 던진다. 역사를 안다면 세계전쟁이 어떤 경고 신호도 없이 돌발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다.
그가 말하는 역사가의 역할은 점쟁이처럼 미래를 알아맞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미래와 관련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 예측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을 구분하는 것"이다.
이처럼 다양한 주제를 다룬 '역사론'에서 홉스봄이 가장 강조하는 것은 '역사에서의 미래의 역할'이다. 그는 E H 카가 말한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는 명제에서 나아가, 과거의 힘을 빌려 만들어나가는 미래와의 대화라고 역설한다.
"실제 존재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를 구별하지 않으면 역사가 존립할 수 없다"는 그의 확신이나, 역사를 '특수사'가 아닌 각 분야를 모두 아우르는 '전체사회사'로 복원해낸 업적, 인접 학문의 다양한 성과를 끌어들여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새 지평을 연 것 등은 바로 이같은 확고한 역사 인식에 뿌리박고 있다.
특히 원칙을 지키되 상대 진영의 이론도 열린 마음으로 대했던 홉스봄의 학문하는 자세는, 멀게는 고대사에서 가깝게는 일제와 군부독재 시절의 역사 기술과 평가를 놓고 '사실'과 '주장'이 뒤범벅된 채 소모적 논쟁을 거듭하고 있는 우리 역사학계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희정기자 jay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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