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약(公約)이 인기를 의식한 '공약(空約)'이라고 새삼 비판할 생각은 없다. 어차피 공약은 사회 일반의 '정치적 정서'에 맞춰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노 당선자는 이제 새로운 위치와 입장에서 경제현실을 냉철하게 바라봐야 한다. '노무현 경제'에 대한 국내외 시장의 평가는 결국 노 당선자가 '정치적 정서'와 '경제적 현실' 사이에서 어떤 균형점을 찾았느냐에 맞춰질 것이다." 정권인수위원회 주요 멤버들의 면면이 드러난 26일 오전. 국내 유력 경제연구기관에서 지난 10여년간 거시경제를 분석해온 한 전문가는 '노무현 경제'의 두번째 성공조건으로 '인기에 대한 유혹으로부터의 해방'을 꼽았다.■중구난방 인기정책은 금물
의외로 상당수 전문가들은 노무현 경제의 성공 여부가 구체적 정책방향 보다도 '첫인상'에서 좌우될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런데 이 '첫인상'이 중구난방식의 '인기발언'으로 얼룩질 경우 '노무현 경제'의 진면목이 오히려 흐려질 수 있는 만큼, 가장 먼저 당선자 주변의 수많은 '입'을 정비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사실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최근 당선자 주변의 한 핵심 경제참모는 느닷없이 "상장사 임원의 연봉을 공개토록 하겠다"는 발언을 한 것으로 알려져 적지 않은 논란을 야기했다. 이에 대해 4대그룹의 한 고위 관계자는 "사실이라면 난감하기 짝이 없다"며 "재벌사의 임원 연봉이 공정하고 투명하게 결정돼야 한다는 것과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공개토록 해야 한다는 주장은 하늘과 땅처럼 다른 얘기"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경제부처의 한 고위 관계자 역시 "의욕이 넘쳐서 나온 얘기일 것"이라면서도 "가뜩이나 유보적 시각이 많은 점을 감안하더라도 노무현 경제의 첫인상을 좌우할 얘기들은 책임있는 정책라인을 통해 질서있게 나와야할 것"이라고 말했다.
■인기 공약 차분한 정리 필요
모든 대선 후보들의 공약과 마찬가지로 노 당선자의 공약에도 적지않은 '무리수'가 눈에 띄는 것이 사실이다. 조세연구원 박기백 박사는 노 당선자의 복지공약과 관련, "세수를 더 확대할 수 있는 여지가 거의 없다"며 "재정이 소요되는 공약은 현실적인 재조정이 시급하다"고 말한다.
내수 부양책이 이미 한계에 다다른 상황에서 나온 잠재성장률 기준 '7% 성장론' 역시 그렇다. 만약 그것이 중장기적으로 현 정부의 '동북아 비즈니스 중심국 실현방안'의 성공과 고용확대를 전제로 하고 있다면, 외국인 투자환경 개선조치에 대한 노동계의 반발을 어떻게 소화할 지에 대한 전략이 먼저 나와야 한다.
경제정의실천연합 관계자는 "노 당선자의 공약 중 농업개방 관련 대외통상정책 등은 신중한 반면 잠재성장률, 가계부채 대책, 복지정책 등은 모호하거나, 재정을 감안할 때 실현 가능성이 낮다"며 "오히려 당선자가 공약을 지키기 위해 무리수를 두는 것을 우려해야할 상황"이라고 말했다.
공약 정리 작업을 위해 당선자측과 기존 경제정책의 핵심 브레인들이 함께 모여 '노무현 경제'의 토대를 이룰 공약시행 범위를 추출하는 작업도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이와 관련, 금융연구원 최공필 박사는 "당선자가 공약의 세부사항에까지 얽매일 필요는 없다고 본다"며 "공약의 큰 틀을 감안해서 현실적으로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유보해야 하는지를 차분하게 정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명확한 정책결정 원칙 세워야
현 정부의 노·사·정 위원회는 명분과 사회일반의 정치적 정서에 부합하는 측면에도 불구하고 그리 성공한 시스템으로 평가되지는 못하고 있다. 비판론자들은 "구조조정이라는 당위와 노·사 양측의 합의구조라는 명분 사이에서 정부가 원칙없이 오락가락한 대표적 사례"라며 "차기 정부는 민감한 사안일수록 정책결정에 명확한 원칙을 세우고 사태를 확고하게 장악해야할 것"이라고 주문한다.
노 당선자가 직면하고 있는 경제 현안 가운데에도 주5일 근무제나 집단소송제 추진 등 정책결정의 분명한 원칙이 요구되는 것들이 즐비하다. 경제부처의 한 관계자는 "민감한 현안 뿐 아니라 성장과 분배, 개발과 환경, 경쟁력 제고와 균등한 기회 부여 등 상충하는 가치가 각 경제정책별로 양립해 의사결정이 표류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며 "어떤 방향이든 당장의 인기 보다 국가 대계와 현실을 감안해 확고하고 일관성 있는 정책원칙을 세워나가야할 것"이라고 주문했다.
/장인철기자 icjang@hk.co.kr
■ 정권인수위 경제팀
정권인수위 경제 부문 1,2 간사로 이정우(李廷雨·52) 경북대 교수와 김대환(金大煥·53) 인하대 교수가 임명되면서 '노무현(盧武鉉) 경제'의 색깔이 더욱 선명해졌다. 자본주의 주류(主流) 경제학에서는 철저히 외면당하고 탄압당했던 정치경제학이나 분배경제학 등을 전공한 50대 초반 비(非)주류 경제학자들이 전면에 나서면서 분배와 형평에 중점을 둔 경제 개혁이 가속 페달을 밟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이론적 뿌리는 변형윤(邊衡尹) 서울대 명예교수의 제자그룹인 '학현(學峴·변 교수의 아호)학파'. DJ노믹스의 이론적 틀을 제공하기 위해 학현학파 일부 교수들이 결성한 '중경회' 에는 직접 참여하지 않았지만, 중경회 노선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DJ정권 초기 경제수석 등을 지낸 김태동(金泰東) 금융통화위원은 "이 교수는 학현학파 멤버들 중에서도 분배의 형평성을 중시하는 축에 속하고, 김 교수는 노동 분야에서 진보적 이론을 설파해왔다"며 "특히 두 사람은 현 정부에 대해서도 개혁의 미진함, 분배의 제고 등을 줄기차게 지적해왔다"고 말했다.
이 교수의 경제 철학은 선(先)분배, 후(後)성장을 통한 불균형 해소다. 이 교수는 특히 올 초 발표한 '경제위기 이후 한국의 불평등' 논문에서 토지 보유세 강화 종업원지주제 도입 지식자본(교육) 분배 지역 및 성 차별 완화 등을 강력히 주장했다.
김 교수는 한국노총 자문위원, 참여연대 정책위원장을 맡는 등 왕성하게 현실 참여를 해 온 실천성을 갖춘 진보 학자로 평가된다. 특히 시장의 횡포를 방치하는 '신자유주의'에 반기를 들며 DJ노믹스의 이론적 틀인 '민주적 시장경제'의 제대로 된 실천을 부르짖고 있다.
/이영태기자 ytlee@hk.co.kr
유병률기자 bryu@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