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내 몸 안에서 '오기'라는 놈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펜텍의 얕은 술수에 말려 그대로 미국 시장 수출을 포기한 채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더욱이 펜텍은 펜텍코리아를 설립하면서 모나미의 무역부장 출신 임원을 스카우트해 지사장으로 앉혀 나를 더욱 화나게 했다. 그는 내가 무척이나 아끼던 부하 직원이었고 모나미에서 승승장구하던 친구였다. 그가 빠져나가자 모나미의 무역부가 풍비박산 지경에 이를 만큼 그의 공백에 따른 타격은 매우 컸다. 나는 배신감에 몸이 떨려왔다.나는 우선 무역부 직원을 미국으로 보내 미국의 문구류 유통 현황을 체크했다. 관건은 대형 슈퍼마켓이나 쇼핑몰이었다. 그곳에 모나미 제품을 납품할 수만 있다면 승산은 있었다. 독점판매권을 가진 펜텍의 반발과 방해 공작이 예상됐지만 나는 밀어붙이기로 결심했다. 수차례 미국을 오간 끝에 나는 세계적인 유통업체인 월마트와 모나미 153 볼펜 등 문구류 50만 달러 어치를 수출하기로 계약을 체결하는데 성공했다.
미국에 도착한 제품이 월마트 제품 진열장에 걸리기 시작하자 펜텍측으로부터 항의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그래도 나는 눈 하나 깜짝 하지 않았다. 할테면 해보라는 식으로 버텼다. 그 방법 외에 다른 길은 없었다. 결국 펜텍측은 우리와 맺은 독점판매권을 방패삼아 미국 법원에 모나미를 상대로 계약 위반에 따른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
나는 오히려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모나미도 즉시 우리나라 법원에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냈다. 독점판매권을 손에 쥐어줬는데도 모나미 제품을 사가기는커녕 거꾸로 독점판매권을 무기 삼아 모나미의 수족을 묶은 뒤 동남아시아의 값싼 물건을 수입해 모나미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는 것이 소송의 주된 이유였다. 그때부터 한국 미국 양쪽에서 기나긴 법정 다툼이 시작됐다.
모나미는 월마트에 제품을 공급하면서 이윤 폭을 대폭 낮췄다. 직접 미국 시장을 뚫어야 하는 마당에 다른 회사 제품들과 같은 값을 받으면 성공하기 힘들다고 판단했다. 그러다 보니 펜텍측이 울상을 짓기 시작했다. 값싼 동남아시아산 제품을 수입, 펜텍 브랜드를 붙인 뒤 10∼30%의 이윤을 얹어 판매하고 있는 마당에 모나미가 펜텍보다 훨씬 싸게 제품을 공급하기 시작하니 경쟁이 될 리가 없었다. 펜텍의 법적 공세는 더욱 가열됐다.
모나미도 한국계 미국인 여성 변호사를 영입, 본격적인 소송 절차에 들어갔다. 펜텍의 부당 행위를 입증할 수 있는 자료를 제출하고 반박 자료도 내는 등 차근차근 대응해 나갔다. 한국에서 펜텍코리아를 설립하고 모나미 임원을 빼가는 등의 비열한 행위도 법정에서 적나라하게 증명됐다.
한국과 미국에서 의도한 대로 소송이 진행되지 않고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펜텍측은 화해안을 제시했다. 펜텍이 미국 시장에서 입은 피해를 보상해달라는 것이었지만 그 액수가 터무니 없었다. 결국 펜텍측의 제안으로 모나미와 펜텍은 일체의 소송을 취하하는 조건으로 화해했다. 형식은 화해지만 내용은 모나미의 승리였다.
나는 펜텍과의 소송전을 통해 기업이 해외로 진출하기 전에는 반드시 현지 법 체계와 관습, 관행, 문화 등을 철저히 연구해야 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소송이 화해로 종결된 뒤 모나미 미주법인 설립 작업에 착수, 92년 미국 LA에 현지 법인을 설립, 모나미의 대미 수출 업무를 대행토록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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