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천년의 세월을 보내고 맞는 아쉬움과 기대로 가득찼던 1999년 말과 2000년 초 무렵부터였을 것이다. 그때부터 한해를 보내고 맞는 의식이 마치 종교적 순례처럼 됐다. 이번 연말과 연초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 행렬에 동참한다. 주제는 역시 '붉은 해'다. 마감하고 시작하는 해를 보기 위해 사람들은 서쪽과 동쪽 해안선으로 몰린다. 그래서 명소가 생겼다. 일몰, 일출로 유명한 바닷가를 돌아본다.
석모도 ● 인천 강화군
일몰 구경이 아니더라도 석모도 가는 길은 즐겁기만 하다. 차 타고, 배 타고, 걷고…. 본격적인 여행은 석모도행 카페리가 출발하는 강화 외포리에서 시작된다. 여행객 대부분이 차를 갖고 섬에 들어가기 때문에 포구에는 사람 대신 차가 줄을 선다. 카페리는 승용차 48대를 태울 만큼 대형이다.
배를 타기 전 새우깡 한 봉지는 필수. 배를 따르는 하얀 갈매기떼를 위해서다. 사람들이 던져주는 먹이에 길들여진 이들은 물고기를 잡는 본능마저 잊은 듯 가끔 식당가의 쓰레기통까지 뒤진다. 그래서 '거지 갈매기'라고도 불린다.
10분 남짓이면 석모도 선착장. 민머루해안을 먼저 찾는다. 선착장에서 섬을 가로질러 반대 방향의 해변이다. 물이 빠지면 끝없이 펼쳐진 갯벌이 반긴다. 일몰의 포인트는 해변 뒤로 난 언덕길. 길을 따라 잠시 올라가면 서쪽 해안이 한 눈에 들어온다. 해는 커다란 송전탑 너머 수평선으로 잠긴다.
석모도를 찾았다면 꼭 보문사에 들러야 한다. 보문사는 낙가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오르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지만 길이 가파르다. 허술한 슬리퍼나 굽 높은 신을 신었다가는 낭패를 본다. 보문사 참배의 하이라이트는 마애관음보살입상. 눈썹바위라는 절묘하게 생긴 바위 아래 거대한 관음보살상을 새겨 놓았다. 365개의 계단을 올라야 한다.
안면도 ● 충남 태안군
안면도는 당초 섬이 아니라 육지와 연결된 태안곶이었다. 그러나 조선 인조때 안면도와 보령 사이의 천수만을 통해 남쪽 들녘의 곡식을 서울로 옮기기 위해 육지와 붙어있던 안면읍 창기리와 남면의 신온리 사이를 잘랐다. 졸지에 육지와 떨어진 안면도는 330여년이 지난 1970년에 연륙교가 놓이면서 다시 육지 같은 섬이 됐다.
안면도 여행법은 남북으로 길게 나 있는 종주도로를 타고 가면서 중간중간 샛길로 들어가 다양한 모습의 바다를 감상하는 것이다. 꽃박람회가 열린 꽃지해수욕장을 비롯, 섬을 빙 둘러 모두 12개의 해수욕장이 있다. 하나같이 아름답다. 종주도로의 길이는 24km. 마음에 드는 곳에서 다소 여유를 부려도 하루 정도면 섬의 구석구석을 모두 돌아볼 수 있다.
해질녘이면 반드시 서쪽 해안으로 나와야 한다. 안면도의 제1경은 서해를 붉게 물들이는 낙조다. 그 중 꽃지해변의 낙조는 아름답기로 정평이 나 있다. 갯벌에는 두개의 커다란 바위가 서로 붙든 듯이 따로 서 있다. 할미바위와 할아비바위이다. 밀물일 때에는 모두 물에 잠겨 헤어지지만, 물이 빠지면 밑둥까지 드러나 다시 손을 잡는다. 해는 그 사이로 진다.
안면도 가는 길엔 겨울 진객이 반긴다. 섬 동쪽 바다인 천수만은 철새의 천국이다. 반쯤 물이 얼어있는데 그 얼음과 물 사이에 철새들이 거대한 띠를 만들며 쉬고 있다.
변산반도 ● 전북 부안군
서해안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변산반도는 서해안 관광명소의 하나가 됐다. 서울에서 약 2시간이면 닿는다. 과거 '봄 변산, 가을 내장산'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봄경치가 뛰어나지만 이제는 사시사철 사랑받는다.
천년고찰 내소사를 중심으로 격포, 채석강, 적벽강, 내변산, 개암사 등 아름다운 풍광이 즐비하다. 곰소 염전이나 젓갈시장 등 입으로 느낄 수 있는 명소도 많다.
변산반도의 겨울바다는 채석강과 변산 해수욕장이 대표한다. 채석강은 시루떡을 켜켜이 쌓아놓은 모습의 기암. 바다 깊숙이 드리워진 바위는 파도에 깎여 넓은 광장이 됐고 바다와 거리를 둔 바위는 옆구리만 패인 채 속살을 훤히 드러낸다. 썰물이 되면 돌광장에 오를 수 있다. 기괴하게 생긴 바위 절벽을 코앞에서 바라볼 수 있다.
변산 해수욕장은 고운 모래갯벌이 매력이다. 특히 석양이 질 때 이 갯벌이 진가를 발휘한다. 변산의 낙조는 유난히 붉은 것이 자랑. 그 붉은 빛이 바다를 물들이다가 물기를 머금은 모래 갯벌까지 올라온다. 모두 붉은 모래 위에 서서 한 해가 저무는 것을 바라본다.
추암해변 ● 강원 동해시
동해안 관광의 얼굴이 된 곳이다. 특히 두타산이 근처에 있기 때문에 일출과 산행을 연계한 여행코스로 으뜸이다. 과거 이 곳의 제1경은 해송이 늘어선 송정해변이었지만 이제는 자취조차 없다.
애국가의 배경화면으로 등장하는 추암은 하늘을 찌를 듯한 촛대바위로 유명한 곳. 무엇보다 일출이 장관이다. 동해시는 어둠 속에서도 촛대바위의 위용을 잘 감상할 수 있도록 밤에 오렌지빛 조명을 밝혀놓았다. 노랗게 빛을 뿜는 기암의 사이로 솟아오르는 장엄한 일출…. 환호성이 절로 터진다.
일출이 끝나면 아침햇살을 맞으며 두타산에 오른다. 추암에서 두타산까지는 차로 20여분. 산행의 출발점은 명경지수가 바위를 타고 흐르는 무릉계곡이다. 300∼400여명이 넉넉히 앉을 수 있는 무릉반석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지금은 눈에 덮여 몹시 미끄럽다.
반석을 지나면 1,300여년의 역사를 간직한 고찰 삼화사가 있다. 두타산의 두타(頭陀)는 '탐착을 버리고 심신을 수련한다'는 의미의 범어를 음역한 말이다. 이름부터 불교와 인연이 깊은 두타산은 동해안의 사람들에게 영적인 모산(母山)으로 대접을 받아왔다. 한때 10여개의 절과 암자가 있었지만 전쟁과 풍파로 대부분 없어지고 삼화사와 기도도량인 관음암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삼사해상공원 ● 경북 영덕군
영덕군 강구항은 드라마 '그대 그리고 나'의 촬영장소가 되어 갑자기 유명세를 탄 곳. 삼사해상공원은 강구항을 내려다 보는 호젓한 언덕에 서 있다. 높은 언덕 위에서 푸른 동해를 조망하며 웅장한 일출을 감상할 수 있다. 왼쪽으로 펼쳐지는 강구항이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는 모습이 일품이다. 서울에서 승용차로 6시간30분 이상 걸려 상대적으로 덜 붐빈다.
한반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안도로를 꼽으라면 몇년 전만 해도 남한 최북단인 고성과 부산을 잇는 7번 국도였다. 한쪽으로는 백두대간을, 반대편으로는 푸른 동해를 보며 달렸다.
그러나 요즘은 사정이 많이 바뀌었다. 도로 곳곳이 확장되고 직선화하면서 마을을 우회하고 난간마저 높아졌다. 드라이브의 운치가 크게 줄었다. 강구항에서 출발하는 20번 지방도로는 정말 아름다운 해안도로이다. 약 30㎞로 1시간이 넘게 걸린다. 길은 바다와 바짝 붙어 달린다. 바다는 차창 바로 바깥에 있다. 센 파도가 바위에 부서지면서 뽀얗게 차 유리를 덮는다. 길 바로 옆 갯바위에서는 낚싯대를 드리운 태공이 바람과 씨름을 한다.
길 곳곳을 공원으로 만들어 놓았다. 해맞이를 위해서다. 가로막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탁 트인 바다, 그 위로 고깃배만 한가롭게 떠다닌다. 한 번쯤 소리를 질러볼만하다
장기곶 ● 경북 포항시
장기곶은 호미곶이라고도 한다. 조선 명종때 지어진 '산수비경'에서 한반도는 '호랑이가 연해주를 할퀴는 형상'으로 백두산은 호랑이의 코, 장기곶은 그 꼬리에 해당하는 곳이라 했다. 고산자 김정호는 최동단을 확인하기 위해 이 곳과 울진군 죽변곶을 일곱차례나 오갔고 결국 대동여지도에 이 곳을 더 동쪽에 그려 넣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민족정기를 말살하려 했던 일본인들은 한반도를 토끼로, 장기곳을 토끼꼬리로 둔갑시켜 놓았다.
장기곶에서 그림같은 해안도로를 타고 10여분을 남하하면 구룡포. 이 항구는 대규모 어항으로 수천 척의 고깃배가 수시로 들락거린다. 항구 가득한 비린내, 출어준비에 바쁜 뱃사람들의 표정, 항구 앞으로 줄을 이은 각종 식당…. 포구의 정취가 물씬 풍긴다.
구룡포에서 31번 국도를 따라 감포, 나정을 지나면 대왕암이 나온다. 신라 문무왕의 "화장을 해서 동해에 뿌려달라"는 유언에 따라 그의 유골은 동해의 한 바위에 뿌려졌다. 그 옛날에도 얼마나 왜구의 침탈이 심했으면 죽어서도 동해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고 마음을 먹었을까. 대왕암 주변에는 유난히 안개가 많이 낀다. 짙은 해무와 검은 바위의 사이로 아침해가 떠 오르는 광경은 신비롭기까지 하다.
/글·사진 권오현기자 k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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