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아침에 꽤 일찍 일어납니다. 대체로 4시 반이나 5시면 일어나니까요. 물론 저녁이면 잠자리에 드는 시간이 좀 빠릅니다. 자정을 넘기는 경우도 없지 않지만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오늘 일어났으니 오늘 잠을 자야 그것이 '정도(正道)'라는 생각조차 하고 있습니다.저는 이러한 생활습관이 아주 좋은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누구나 아는 '새 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일어납니다'라는 동요를 저는 언제나 자신 있게 부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이러한 긍지가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줄은 몰랐습니다. 그것도 30, 40년이나 지난 뒤에 말입니다. 사연인즉 이러합니다. 자식을 낳아 기르면서 저는 제 자랑스러운 삶을 그대로 자식들에게도 전해주리라고 마음을 다졌습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지 않는 것은 게으른 것이고, 게으른 것은 나쁜 것이라는 등식을 분명하게 하고는 자식들을 '나쁘게' 만들지 않겠다고 결심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달랐습니다. 자식들이 자라 젊은이들이 되면서 사태는 정반대로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어렸을 때는 괜찮았습니다. 늦잠을 자도 꾸중을 하며 깨우면 그렇게 따라왔습니다. 하지만 대학에 다니는 아이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늘'이란 그 날 자정에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공부를 하는 경우도 있고 노는 경우도 있지만 아무튼 '하루'의 경계는 사뭇 고무줄 같았습니다.
화가 났고, 호소도 했고, 실망도 했습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제 신념은 자식들에게 상처만을 남기는 폭력이었습니다. 지금 돌아보건대 그런 속에서도 잘 견뎌준 자식들이 고맙기만 합니다.
제 잘못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저는 농경문화의 마지막을 살아온 사람이지만 자식들은 산업사회의 한복판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 실수입니다. 농경사회는 낮의 문화입니다. 그래서 해가 뜨면 일어나야 하고 해가 지면 자야 합니다. 당연히 일찍 일어나는 것은 기려야 할 덕목이 됩니다. 그러나 산업사회는 밤의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새벽에 서둘러 일어나야 할 필연적 까닭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지런한 것은 그것 자체로 옳은 덕목이지만 일찍 일어남이 곧 부지런함이라고 등가화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렇게 삶의 구조가 달라진 것을 살피지 않은 채 제 경험이 낳은 규범만을 강제하면서 새 시대를 사는 새 인간들을 구박한 것입니다.
한데 요즘 세상을 살면서 어쩐지 저와 같은 과오를 범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듯 합니다. 자기 경험의 절대성, 자기 세계의 규범성을 무조건 모든 경험에다, 또는 온 세계에, 그대로 적용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지 못한 정황에 대한 질타와 분노가 철철 넘치기 때문입니다. 우리 정치의 현실도 그러하고, 직장의 분위기도, 가정의 정서조차, 그러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 나의 현실과 다른 현실이 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는 변화과정 안에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새로운 다른 사람과 새로운 다름을 직면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러므로 자기의 경험과 판단과 신념을 되살피는 노력을 게을리 한다는 것은 그것 자체가 '부도덕 한 삶'이라는 것, 이러한 일을 깨닫는 일이 요즘처럼 절실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되살핌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과 다른 정황과 만나야 비로소 삶이 삶다워질 듯 한데 그럴만한 여유를 마련하고 있지 못한 것 같습니다.
몇 년 전에 멀리 떨어져 산지 여러해 되는 자식들과 함께 어느 대학의 게스트하우스에 묵은 적이 있습니다. 새벽이 되자 저는 마치 관성처럼 일어나 자식들 방문을 두드렸습니다. 새벽 5시 일입니다. 작은 녀석이 눈을 비비며 말하더군요. '아버지, 하나도 변하지 않으셨군요!'
대통령 선거도 끝났고,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이 변화의 흐름 속에서 저와 같이 불변하는 '괴물'이 되시지 않기를 바랍니다.
정 진 홍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