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찾아와 빌지 않는, 이제는 폐허가 된 원형의 신전에 나타나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 역시 신에게 빌지 않고, 다만 꿈만 꾸는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은 보르헤스이다. 소설 속의 주인공은 꿈꾸기 위해서 잠을 잔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잠만 잔다. 사람들이 먹을 것을 갖다 준다. 꿈꾸는 것이 그의 일이다.아니, 이 말은 틀렸다. 그는 왜 꿈을 꾸는가? 꿈을 통해서 한 사람을 탄생시키기 위해서라고 작가는 말한다. 그의 꿈 속에서 한 사람이 태어난다. 그 과정은 그러나 쉽지 않다. 그는 지난한 과정 끝에 한 사람의 생명을 탄생시킨다. 한 사람을 태어나게 하기 위해 그는 꿈을 꾸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그의 일이다.
예컨대 이즈음의 나는 소설가란 자들이 누군가를, 혹은 무엇인가를 태어나게 하기 위해 꿈 속으로 들어가는 종자들이라는 생각을 종종 한다. 현실의 진흙구덩이 속에서 뒹굴고 다투고 계산하는 것은 다른 이들의 몫이다. 소설가는 이 세계 너머에, 또는 그 안쪽 깊이에 이 세계와 다른, 혹은 똑같을 수도 있는 또 하나의 세계를 설계한다. 그것은 꿈꾸기를 통해서만 가능한 세계이다.
그가 꿈을 통해 창조해낸 세계가 현실의 세계와 똑같아서 구별되지 않는다고 해도 불필요한 것이 아니고, 현실의 세계와 너무나 동떨어져 있어서 도무지 연관이 되지 않는다고 해도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그는 사는 자가 아니라 꿈꾸는 자이다. 아니, 그의 꿈꾸기가 곧 삶이다. 그는 살기 위해 꿈꾸고, 꿈꾸기 위해 산다. 그러므로 현실의 세계와 꿈의 세계가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똑같거나 그 두 세계가 너무나 동떨어져서 도무지 아무런 연관을 지을 수 없다고 해도 꿈꾸기를 포기하고 현실 세계에 섞여 버릴 수는 없다.
'소설로 인생에 복무한다'는 문장을 나는 가끔 반추한다. 언젠가 한 지인이 자신이 펴낸 책의 첫 장에 써서 내게 준 말이다. 그는 괜찮은 목사이고 성실하고 꼼꼼한 비평가이다. 그가 써준 문장을 대할 때까지 나는 내가 왜 문학을 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 어떤 답도 장만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물음은 마치 왜 사느냐는 물음처럼 부피는 너무 크고 무게는 없었다. 무게 없는 부피는 부담스럽지만 억압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부담스럽지만 해답을 마련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버틸 수 있다. 그리고 또 반드시 어떤 대답을 장만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정도의 부담을 가진 채로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왜 사느냐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도 별 대과 없이 살아간다. 삶의 마지막 순간을 왜 사는지 알지 못하거나 왜 사는지 생각해 보지 않은 채 맞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질문은, 밖에서 안에서 간단없이 출몰했고, 그때마다 나는 어떤 임시의 대답이라도 마련해 가지고 싶었다. 나는 왜 문학을 하는 것일까? 예컨대 정치나 조경이나 농사를 하지 않고 왜 문학을 하는 것일까?
는 이에 따라서는 다소 막연하고 포괄적으로 들릴 수도 있는, 소설로 인생에 복무한다는 그 말이 아주 구체적이고 그럴 수 없이 명징한 충고가 되어 내 가슴에 박힌 것은 임시적이고 불충분할지라도 하나의 대답을 갖게 되기를 바랐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복무한다는 것은 그것에 자신의 삶을 건다는 뜻이다. 혹은 그것을 통해 자신의 삶을 꾸린다는 뜻이다.
누군들 무엇을 위해서든 자신의 몸과 정신을 바치지 않겠는가. 무엇엔가 바치지 않는 삶이 어디 있겠는가. 무엇엔가 바치지 않고 영위하는 삶에 무슨 무게가 있겠는가? 복무한다 함은 소명의 다른 말이다. 나는 이 엄숙주의의 냄새가 나는 문장을 부피만 크고 무게는 없는 그 질문에 대한 임시방편의 해답으로 취하기로 했다.
그런데 왜 소설이고 문학일까? 현실 속에 들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 현실 너머, 또는 그 현실의 깊이에서 다른 현실을 꿈꾸는 것이 소설이고 문학이기 때문이라고, 사는 것이 아니라 꿈꾸기, 꿈꾸기가 곧 살기인 영역이 그곳이기 때문이라고 보르헤스는 가르쳐준다. 주어진 하나의 현실 세계와 구별된 다른 세계에 대한 기대가 없는 곳에 문학이나 소설이 자리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한편으로 그곳에 빠져드는 자의 처지의 열악함을 상기시키면서 동시에 그로 말미암은 정신의 우월감을 같이 불러낸다. 열등하기 때문에 우월하고, 비루하기 때문에 고상하다는 명제는 이 대목에서 진실이다. 누가 꿈꾸는가. 몸이나 처지나 조건이 온전하지 않은 자가 아니라면 누가 구태여 꿈을 통해 살기를 희망하겠는가?
그러나 다시 질문해 보자. 저 폐허가 된 신전에 와서 꿈꾸는 자는 대체 누구인가? 그는 꿈을 통해 하나의 인격, 하나의 세계를 창조해낸다. 비루하기 때문에 꿈꾸지만, 꿈꾸기 때문에 그는 고상하다. 삶의 열악함이 그에게 꿈을 강요하지만, 그러나 그는 그가 꾸는 꿈을 통해 위대해진다.
그가 꿈꾸는 자리가 버려진 신전이라는 사실은 어떤가. 신의 광휘가 사라진 신전은 황폐하다. 사람들은 기도도 하지 않고 찬양도 하지 않는다. 제물도 가져오지 않는다. 신은 잊혀졌다. 신전이 황폐해진 것은 신이 잊혀졌기 때문이다. 잊혀진 신의 집만이 황폐해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은 신전이다. 버려졌지만 신전이고, 신전이지만 버려졌다. 버려지지 않았다면 그곳에 사제가 있을 것이고, 그러므로 꿈꾸는 자는 그곳에 없을 것이고, 신전이 아니라면 신전이 아니기 때문에, 세속이기 때문에 그곳에 없을 것이다.
재미를 추구하는 사람은 더 이상 소설책을 읽지 않고, 지식이나 정보를 원하는 사람도 문학판에 머물지 않는다. 않을 것이다. 세상에는 소설책보다 더 재미있는 것이 너무나 많고 문학보다 더 유익한 것 또한 넘쳐난다. 남은(남을) 사람은 소설이나 문학에서 오락성과 실용성이 아닌, 그것만의 고유한 가치를 보았거나 보리라고 기대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주어진 하나의 현실 세계에 만족하지 않거나 만족할 수 없거나 만족해서는 안 된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주어진 하나의 현실 세계가 아니라 꿈꾸기를 통해 얻어지는 또 하나의 세계가, 주어진 하나의 현실 세계를 위해서도, 필요하다는 믿음, 그렇게 함으로써 현실로 주어진 하나의 세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믿음, 그 믿음이 이제 빌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도 없는 황폐한 원형의 신전을 찾게 한다.
그는 열등하기 때문에 꿈꿀 수밖에 없지만, 꿈꾸기 때문에 위대해진다. 그는 비루하기 때문에 꿈꾸지만 꿈꾸기 때문에 고상해진다. 그러나 알 듯이 보르헤스의 주인공이 생명을 탄생시키는 과정은 힘들고 지난했다. 위대해지고 고상해지기가 그렇게 힘들고 지난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또한 안다.
● 연보
1959년 전남 장흥 출생 1981년 '한국문학' 신인상에 중편 '에리직톤의 초상' 당선 등단 1983년 서울신학대 졸업 2001년∼현재 조선대 문예창작과 교수
소설집 '구평목씨의 바퀴벌레' '일식에 대하여' '세상 밖으로' '미궁에 대한 추측' '목련공원' '사람들은 자기 집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아주 오래 살 것이다' 장편소설 '에리직톤의 초상' '가시나무 그늘' '따뜻한 비' '황금 가면' '생의 이면' '내 안에 또 누가 있나' '사랑의 전설' '태초에 유혹이 있었다' '식물들의 사생활' 등 대산문학상(1993) 동서문학상(2002)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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