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이 끝난 지 일주일이 지났다. 요동치며 변화해 온 바닥 민심도 숨을 고르고 있다. 부산에서 대구 청주를 거쳐 경기 북부 접경지대 동두천까지, 또 전남 목포에서 대전을 거쳐 강원 인제로 북상하면서 민심의 움직임을 다시 들여다봤다. 필부필부(匹夫匹婦)들을 만나 정제되지 않은 목소리와 거친 숨결을 들었다. 선거결과에 대한 앙금이 아직 상당히 남아 있었지만 지역갈등 해소와 정치개혁, 경제안정을 원하는 목소리는 한결같았다."글쎄, 하는걸 봐야지"
김해공항에 내려 탄 택시가 공항을 벗어나면서 기사가 왼쪽(부산 강서구)을 가리켰다. "여기서도 떨어졌는데 대통령이라니, 말도 아이다." 노무현(盧武鉉) 당선자의 2000년 16대 총선 낙선 얘기였다. "그래도 지역사람 인데 기대가 크겠다"고 하자 "글쎄, 하는 걸 봐야지"라며 입맛을 다셨다.
시청 앞에서 만난 박태규(53·회사원)씨는 "개표 결과가 나왔을 때만해도 '이럴 수가'였는데 분위기가 많이 차분해졌다"고 전했다. 그는 "(노 당선자가)지역 출신이라 그런 모양"이라며 "(부산 사람들은) 앞으로 대구는 다 갔다는 농담도 한다"고 덧붙였다. 노래방을 운영한다는 40대는 꽤 과격한 표현을 썼다. "뭐라 그래도 김대중(金大中) 방패막이 아이가." 그는 부산 사람들은 여전히 '민주당=김대중=노무현' 등식을 지우지 않고 있다며 잔뜩 인상을 썼다.
중구 남포동 자갈치 시장의 오후는 진한 비린내 속에 시끌벅적했다. 선거운동 초기 '자갈치 아줌마'가 화제가 됐었다. 노무현 지지 TV 연설원으로 등장한 자갈치 아줌마 때문에 시장 전체가 들썩댔고 여진은 아직 남아 있었다. 꼴뚜기 좌판을 벌여 놓은 상인은 "자기 혼자 생각하는 걸 갖고 자갈치 아줌마 대표식으로 나오면 우짜노. 한동안 매출도 떨어지고 항의를 많이 받았다"며 침을 튀겼다. 그는 "사람이야 노무현이 좋지. 하지만 DJ 비리를 밝혀 내려면 이회창(李會昌)이 제격인데. 노무현씨는 그렇게 못할 것 같다"고 했다.
"젊은층 일낼것 같더니"
부산역에서 만난 50대는 "젊은 애들이 노는 게 어째 불안하다 싶더만…"이라며 얘기를 시작했다. 30% 가까운 부산에서의 노무현 지지는 '지역 때문이 아니라 젊은 표심 때문'이라는 해석이 이어졌다. 그는 "대학 다니는 아들 둘도 2번 찍겠다고 해서 대판 싸우고는 투표하지 말라고 했다"고 묻지 않은 말까지 했다. 부산에선 선거를 앞두고 다혈질 택시기사와 젊은 대학생간 시비 끝 폭행도 심심찮았다고 한다. 그는 하지만 "선거 끝났는데 우짤끼고, 노무현씨가 민주당 헤쳐 모여 시키고, 비리 척결해서 우리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으면 한다"며 웃었다.
■대구
경부선 열차편으로 올라온 대구 중심가 반월당엔 한창 캐롤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개표하는 날 술먹고 아직 안 깨어난 사람도 많다고 하데요." 택시기사의 농담에 대구쪽의 허탈감이 배어나왔다. 대구백화점 인근에서 옷 가게를 하는 40대 남자는 "시대가 변했다는데…"라며 여운을 남겼다.
중구 서문시장은 이회창 후보 부인 한인옥(韓仁玉)씨가 투표를 앞두고 눈물을 흘리고 간 곳이다. 중구는 이 후보에게 전국 최고 지지(80.4%)로 화답했다. 그리고 "개표일엔 상인들이 소줏잔을 앞에 두고 눈물을 흘렸다"고 시장 초입 포장마차 주인은 말했다. 지역 신문의 한 기자는 TK의 한나라당 짝사랑이 "김영삼(金泳三) 정권이후 깊어진 소외감을 풀어줄 대타를 찾았기 때문"이라고 했고, "그러다보니 이회창씨 고향을 대구로 아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대구의 젊은 표심이 궁금했다. 경북대에서 대학생들을 만났다. 기호2번을 찍었다는 대학생을 어렵지않게 만날 수 있었다. 그는 투표 당일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다 2번을 찍었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왜 고심 했나.
"이회창은 처음부터 싫었고 그렇다고 노무현을 찍자니 민주당이 싫었다. TK에서도 젊은 사람은 노무현쪽이었다. 결과는 18.7%지만 실제 노 지지는 40%를 넘었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투표 당일 절반은 이회창쪽으로 갔다."
―지역감정 때문인가.
"그걸 지역감정이라고 할 수 있나. 호남이 아니라 민주당 패거리가 싫어서라고 봐야 한다."
다른 학생은 "대구 사람들이 한나라당을 그렇게 밀어주는 이유를 모르겠다. 한나라당이 제대로 해준 것도 없는데"라고 했고, 또 다른 학생은 "이미지 싸움에서 졌다. 한나라당도 젊은 인물을 기용해 빨리 변해야 한다"고 했다.
'양반의 도시' 경북 안동에서 만난 택시기사 하모(49)씨는 대선관련 보도를 접하기 싫어 신문·방송과 담을 쌓고 지내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노무현에 대한 반감은 없지만 민주당의 구세력들이 다시 활개를 칠 것을 생각하니 밥맛이 떨어진다"며 택시안에서 라디오 청취도 사절했다. 안동 K초등학교 김모(50) 교감은 "노무현이라는 간판은 좋은데 대들보와 기둥, 지붕이 문제"라며 좀더 품위있는 표현을 썼다.
■충북
영남을 거쳐 다다른 충청도는 잔뜩 미소를 머금고 있는 듯했다. 충북 청주시 상당구 용암동 용암상가 지구내에서 분식집을 하는 김수미(41·여)씨는 이번 대선은 '충북인이 만든 작품'이라며 의기양양해 했다. 청주 토박이 김씨는 "충북 사람이 미는 후보가 대통령이 된다는 말이 이번에도 들어맞았다"며 "충북 도민이 시대의 흐름을 가장 잘 알고 민심을 제대로 대변한다는 증거"라고 자랑했다. 그는 노 당선자가 청주에 와서 한 약속을 지킬 것을 신신당부했다. "지난번 DJ에게도 몰표를 줬는데 DJ는 충북을 위해서 한 일이 하나도 없다. 노 당선자는 DJ와는 다를 것이다. 약속 꼭 지켜야 한다."
저녁 시간 상당구의 한 고깃집에서 술잔을 기울이는 회사원들의 화제도 수도 이전이었다. "호남고속철 유치위원회처럼 시민들이 발벗고 나서야 하는 것 아니냐" 라고 한 명이 운을 떼자 "그래도 국가적 대사인데 고속철처럼 싸우면 안되는데…"라고 다른 이가 받았다. 또 다른 이는 "오송쪽에 땅이나 좀 사둘 걸"이라고 말했다.
청원군 남일면에서 만난 농민 신모(68)씨는 "이회창을 찍었다"고 솔직히 털어놓으며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기대반 걱정반"이라고 했다. "노 당선자가 서민적이어서 서민을 위한 정치를 잘 할 것도 같고, 한편으론 말이 가볍고 국정 경험도 적어 제대로 할 지 모르겠습니다.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볼랍니다."
■수도권
인천의 표심은 전국의 표심을 반영한다고 한다.
시청근처 간석동에서 슈퍼를 운영하는 40대 여주인은 버럭 화부터 냈다. "먹고 살기도 힘든판에 누가 되면 어때요." 노 당선자를 지지했다는 30대 회사원의 말도 표현은 달랐지만 바탕은 마찬가지였다. "요즘 경제가 아주 안좋고 내년도 최악이라 당선자 어깨의 짐이 너무 무거워 보인다. DJ때는 국가가 부도였는데 노무현 때는 국민이 부도다. 경제개혁을 계속 진행하면서 서민경제 안정을 어떻게 이뤄낼지 걱정이다. 보수 기득권층의 반발을 쉽사리 제거하기도 어려울테고…."
부평구를 찾았다. 철새행각을 보인 지역 국회의원과 대선 표심의 상관관계가 궁금했다. 식당을 운영하는 한재호(48)씨는 "1번을 찍었건 2번을 찍었건 다들 (철새 의원을) 욕한다. 이회창 지지자는 그 양반 때문에 노무현쪽으로 표심이 뭉쳤다고 분석하더라"고 말했다.
경기 동두천시는 미군 궤도차량 여중생 사망 사건으로 시끄럽던 미2사단 캠프케이시가 위치한 곳이다. 전통적으로 한나라당 지지가 많았던 동두천시지만 이번 대선에선 반대였다. 택시와 함께 밑바닥 민심의 바로미터라는 생연동 한 복덕방에서는 50∼60대 동네 주민들이 난상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이해가 안된다니까요. 어떻게 2번표가 더 나왔는지." "햇볕정책으로 전쟁 가능성이 낮아진 데 대한 지지라고 봐야지." "그럼 이회창이는 전쟁하자고 했나." 공무원 출신이라는 60대는 "아파트 들어서면서 젊은 외지인들이 많이 들어온 결과 아니겠느냐"고 편하게 결론 내렸다.
동두천 사람들은 흔히 "전쟁 나면 우린 일단 죽는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그래서 그들은 어느 지역 사람보다 남북·북미관계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하우스보이 10년 경력에 아직도 미군 부대 근처를 못벗어나고 있다는 한모(55)씨는 "(북·미 관계를)신중하게 잘 처리해야 할 텐데"라고 했다. 그리고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경제 어렵지, 남북 문제 어렵지. 노무현씨 이마에 주름살이 또 하나 늘겁니다."
/이동훈기자 dhle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