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볼 테면 해 봐라. 그러나 지금은 클린턴의 시대가 아니다." 북한이 핵 시설에 대한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모든 봉인을 제거하면서 1994년 빌 클린턴 전 대통령 때의 위기 상황으로 치닫고 있지만 미국의 반응은 요지부동이다. 북한이 먼저 핵 프로그램 포기를 선언하고 나설 때까지 대화와 유인책은 없다는 게 미 정부의 일관된 입장이다.미 정부 고위관리는 이같은 미국의 입장을 "냉정하고 차분한 대응, 사태 단계 단계마다 호들갑 떨지 않는 정책"이라고 규정했다. 북한이 위협의 강도를 높이더라도 일일이 맞대응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미국의 이런 태도에는 북한의 핵 시설 재가동이 가져올 수 있는 전략적 위협이 그렇게 심각한 수준은 아니라는 판단이 깔려 있다고 미 CNN이 백악관 고위 관리의 말을 인용, 보도했다. 북한이 당장 핵 시설을 재가동한다 해도 최소한 1년 이상이 걸리고, 그 기간동안 미국이 한국과 일본, 중국, 러시아 등 주변국이나 국제기구를 통한 외교적 압박으로 사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게 미 정부의 생각이다.
이라크 사태에 전념하기 위해 시간을 벌어야 할 필요성도 미국이 '냉정하게' 반응하는 현실적 배경으로 꼽힌다. 하지만 미 정부가 외교적 해법에만 매달릴 것이라고 보는 시각은 많지 않다. 럼스펠드 장관은 23일 "우리는 한쪽에서 결정적으로 승리한 뒤 다른 쪽을 신속하게 패퇴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말해 대 이라크전과 대 북한 공격의 동시 수행 가능성이 미국의 전략 구도에 포함돼 있음을 시사했다.
물론 럼스펠드 장관의 언급은 "북한을 공격할 의도를 갖고 있지 않다"는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기본 입장을 수정한 것이라기보다는 동시전 수행 능력에 대한 원칙을 밝힌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북한의 핵 위협이 고조될수록 "이라크 다음에는 북한"이라는 유혹을 느끼게 될 것으로 한반도 전문가들은 전망하고 있다.
워싱턴의 한 관리는 CNN에서 "미국은 현재 이라크 문제에 집중하고 있지만 '악의 축' 국가들을 한번에 하나씩 상대하는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현재로서는 미국이 북한을 공격할 가능성은 커 보이지 않지만 위기가 더욱 고조될 경우 북한 압박의 실질적 카드로 활용될 수 있다는 얘기다.
미국이 선호하는 해결책은 아니지만 북 핵 문제의 안보리 상정도 예견할 수 있는 수순이다. 필립 리커 국무부 대변인은 "북한의 국제 합의 위반은 북한 문제가 유엔으로 가는 결과를 낳는다"고 말해 IAEA의 봉인 원상회복 촉구가 실패로 돌아갈 경우 안보리를 통한 제재의 수순을 밟게 될 것임을 시사했다.
/워싱턴=김승일특파원 ksi8101@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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