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나무를 사랑한다면/ 봄은 기적 같으리'('산책은 행동'에서)시인 김지하(61·사진)씨에게는 2002년이 그런 한 해였다. 그는 봄에 시 '白鶴峰(백학봉)·1'로 정지용문학상을 수상했다. "두더지처럼 생활했다"던 그는 오랜만의 봄 소식에 환하게 웃으면서 "나는 시인"이라고 되풀이해 말했다.
큰 선물이 또 하나 있다. 4월 말 쌓여 있던 짐꾸러미를 정리하다 미발표 시고(詩稿) 100여 편을 발견했다. 젊었을 적 쓰고 묻어둔 것이다. 이 시를 모아 시집 '花開(화개)'를 펴냈다. 8년 만이었다. "비명과 절규 대신 꽃피는 소리, 별 뜨는 소리를 듣는다"고 한 그의 말처럼 새 시집은 소박하고 다사로운 서정으로 가득했다.
'화개'로 만해문학상, 대산문학상을 잇달아 수상했다. 시대의 겨울 추위와 맹렬하게 싸워온 시인의 상처와 고통이 느지막이 보듬어지는 듯 했다. "많이 써야 좋은 시를 한 편이라도 골라낼 수 있다"면서 부지런히 시를 쓰기 시작한 것도 올해부터였다.
생명운동에서 시작된 그의 사상 기행은 율려(律呂)에 이르렀다. 음양의 조화를 가리키는 전통적인 개념인 율려가 21세기 혼란스러운 사회의 중심 축이 될 것이라고 김씨는 생각한다.
그 사유의 궤적을 정리한 '김지하 사상전집'(전3권) 출간도 뜻깊은 성과였다. 김씨가 세상을 감싸안고 화해하는 길로 나아간 한 해였다.
문단
2002년 문단도 "새로운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작은 성과들이 빛을 발했지만 이 질문에 대한 만족스러운 답은 나오지 않았다. "폭발력 있는 신인의 출현을 보지 못했다. 새로운 세기의 새로운 문학이 무엇인지 아직 확실하지 않으며 탐색의 과정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평론가 황종연 동국대 교수는 말했다.
중견 및 원로 작가들의 저력이 돋보인 해로 기억될 만하다. 한국일보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 은희경씨의 '상속'을 비롯해 동인문학상을 받은 성석제씨의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등 중견 작가들의 소설집이 조명을 받았다. 김수영문학상을 받은 채호기씨의 시집 '수련'은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을 던지며 명상적 시쓰기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서정인(이산문학상) 황동규(미당문학상) 김원일(황순원문학상) 김원우(대산문학상)씨 등 중진·원로 작가들의 문학적 성과가 확인됐다.
올해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랐다는 외신이 전해져 한국 문단을 들뜨게 했던 시인 고은씨의 '고은 전집'(전38권), 이어령 전 이화여대 석좌교수의 '이어령 라이브러리'(전30권)도 출간됐다.
황석영씨의 한국일보 새 연재소설 '심청, 연꽃의 길'은 작가 스스로 "문예 미학을 바탕으로 삼은 소중한 작품"이라고 밝힐 정도로 깊은 애정을 갖고 있는 장편이다. 평론가들은 이 작품을 두고 "한국문학의 문제작이 될 것"이라면서 전개에 주목하고 있다. 그간 침체한 듯했던 신문 연재소설이 잇따라 부활한 것도 2002년 문단의 중요한 사건이었다.
시 전문지가 쏟아져 나온 것도 주목할 만했다. '시작' '시로 여는 세상' '시경' '시인세계' 등이 창간됐다. 작가회의와 민족문제연구소는 광복 57주년을 맞아 친일문인 42명의 명단을 공개하고 선배 문인들의 과오를 사죄한다는 내용의 '문학인 선언'을 발표했다.
권성우 김명인씨 등 소장 평론가들은 메타비평집 '주례사 비평을 넘어서'에서 상찬 일색의 비평을 혹독하게 비판했지만 본격 논쟁으로 이어지지 못한 것은 아쉬웠다.
/김지영기자 kimj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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