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랑, 신부측 집안 모두 한 고향이었다. 그래서 양측 축의금 접수를 내가 맡게 됐는데, 문제는 결혼식이 끝난 뒤 발생했다. 송 전 행장의 처가 식구들이 축의금을 모두 가져 가려 하고, 축의금 가방을 손에 쥔 나는 "절대 그럴 수 없다"며 버티는 상황이 발생했던 것이다. 송 전 행장의 처가 식구들은 행여 신랑 친구나 고향 선후배들이 축의금을 가지고 술이라도 마실까봐 '사전예방' 차원에서 축의금 가방을 빼앗으려 했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피난지의 결혼생활은 참으로 척박했다. 신랑 신부들은 결혼식을 마치면 택시를 타고 해운대나 송도 해수욕장을 한바퀴 돌아본 뒤 살림집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신혼여행을 대신하곤 했다. 말단 세관 공무원의 첫 살림살이는 들여다보지 않아도 뻔한 것이었다. 단칸방에 이부자리 하나, 수저 두벌, 식기 몇 개가 전부였다. 나는 그런 신혼 살림에 한 푼이라도 더 보태주고 싶었다. 그래서 신랑 신부 손에 직접 축의금을 쥐어 주려 했던 것이다.
실랑이는 좀처럼 끝날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송 전 행장 처가 식구들이 잠시 한 눈을 파는 사이, 축의금 가방을 들고 식장 밖으로 줄행랑을 쳤다. 그리고 나서 부산 시내를 배회하며 시간을 보낸 뒤 밤이 돼서야 초량동에 마련한 송 전 행장의 단칸방으로 찾아갔다. 신랑 신부는 그곳에서 첫날 밤을 보내기로 돼있었다. 나는 송 전 행장에게 그의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축의금 가방을 건네줬다.
송 전 행장이 그렇게 서둘러 결혼을 결정하게 된 데는 타향살이의 외로움이 가장 크게 작용했지만 남다른 이유도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삼흥사에 입사했을 때 회사에 타이피스트로 일하던 여사원이 있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데다 미모도 출중하고 맡은 업무도 정확하게 처리해 남성 사원들로부터 인기가 높았다. 마침 회사로 자주 놀러오던 송 전 행장의 눈에 이 아가씨의 모습이 들어왔고 그 때부터 송 전 행장의 마음 한 구석에 그 아가씨가 자리잡기 시작했던 것 같다. 우리 셋은 송 전 행장 덕분에 주말이면 밀수감시선을 타고 이곳저곳 부산의 명소를 돌아다니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날 아가씨 집에서 소동이 벌어졌다.
부친을 일찍 여읜 아가씨 집안은 하숙을 치고 있었다. 마침 아가씨가 송 전 행장을 만나기 전 현역 육군 소령이 그 집에서 하숙을 했었는데, 그 친구가 아가씨를 짝사랑했던 모양이다. 사건은 전쟁터에 나갔던 육군 소령이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후송돼 부산으로 돌아오면서 시작됐다. 병원 치료를 받으며 아가씨 집을 오가던 육군 소령이 어느날 허리에 권총까지 차고 찾아와서는 막무가내로 결혼을 요구하더라는 것이다. 전시 체제하에서 육군 소령의 위세는 대단한 것이었다. 평시에야 그렇지 않지만 전쟁이 나면 당연히 계엄상황이 되고, 그렇게 되면 군인이 모든 권력을 쥐게 되기 때문이었다. 아가씨는 때로는 애원조로, 때로는 협박조로 계속되는 육군 소령의 구애 공세에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가씨의 어머니도 육군 소령의 권세에 밀려 은근히 결혼할 것을 종용했다. 지금이야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그 아가씨는 결국 굴복하고 말았다.
송 전 행장과 피난지 부산에서 함께 겪은 에피소드는 지극히 개인적인 일들이다. 하지만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비록 암울한 시절이었지만 우린 그렇게 사랑하고, 그렇게 낭만을 즐길 줄도 알았다. 어렵고 힘든 환경 아래에서 고단한 삶을 살고 있다 해도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행복이 될 수 있고, 시간이 지나면 아름다운 추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이들이 그런 여유로움과 사랑으로 크리스마스와 연말을 보내길 소망한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