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대 대선은 큰 변화였고 혁명이었다. 냉전 이데올로기가 가미된 보수가 탄탄한 주류를 형성해온 우리 사회에서 '개혁'과 '진보' 물결의 위력을 보여줬다. 일각에선 "과연 이번 대선은 진보세력의 승리인가"라는 질문도 제기되는 상황이다.선거 이후 '온건 진보' 성향의 민주당 노무현(盧武鉉) 후보가 보수 성향의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후보를 누른 것을 놓고 정치 이념의 잣대로 이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얘기들이 자주 나온다. 진보 깃발을 내건 민주노동당 권영길(權永吉) 후보가 3.9%의 득표로 선전한 것도 빼놓을 수 없는 화제다.
"이제 시대가 바뀌고 있다. 진보와 개혁세력의 승리다. 앞으로 보수 간판으로는 어렵다"고 화두가 던져지면서 시작되는 논쟁은 "불과 두 달 전 노 후보의 지지율이 15%선까지 내려갔고, 6월 지방선거 때 한나라당이 압승했던 점을 돌아본다면 선거결과를 진보세력의 우위로만 해석하는 것은 무리" 라는 반론으로 즉각 이어진다. 여기엔 또 "중도 보수 성향의 국민통합21 정몽준(鄭夢準) 대표가 후보단일화의 '멍석'을 깔아줬기 때문에 노 후보의 승리가 가능했다" 는 상황논리가 추가된다. 그러나 이런 논쟁 자체가 '진보 영역이 확대되는 방향으로 전통적 진보―보수 지형이 바뀌고 있다'는 선거결과를 말해주는 것으로 봐야한다.
대선 이틀전인 17일 밤 한국일보와 미디어리서치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자신의 이념 성향을 '보수'라고 규정한 사람은 34.7%, '진보'라고 규정한 사람은 27.0%였다. 또 30.2%가 '중도'라고 응답해 보수, 진보가 거의 균형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줬다. 이 후보 지지자 가운데 보수 성향은 48.6%였으나 진보 성향은 16.2%에 그쳤다. 또 노 후보 지지자 가운데 진보는 38%였으나 보수는 23.7%에 그쳤다.
과거에는 진보적 주장을 하면 '좌파'라고 공격 받았기 때문에 정책 노선 논쟁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노 후보는 다소 진보쪽에 가까운 정책들을 많이 내놓았고 이 후보는 보수적 정책들을 제시했다. 가령 남북관계에서 노 후보는 대북 경제 지원 계속을 주장했으나 이 후보는 대북 현금지원 중단으로 맞섰다. 또 경제 문제에서도 노 후보는 출자총액제한제도 유지 등 재벌 개혁을 강하게 주장했으나 이 후보는 출자총액제한제도를 반대했다.
이런 논쟁은 '냉전 이데올로기' '레드 콤플렉스' 등이 약화된 정치 토양이 형성됐기 때문에 가능했다. 금년들어서는 오히려 거침 없이 반미 구호가 먹혀 들기도 했다. 이런 환경이 조성된 데에는 몇 가지 요인이 꼽힌다. 우선 전후세대 특히 냉전 이데올로기에 영향을 받지 않는 젊은 세대가 늘어나고 그들의 목소리가 커졌기 때문이다. 또 김대중 정부가 시민단체와 진보세력의 활동 공간을 넓혀줬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인터넷의 발달로 기존 문화에 대항하는 세력이 대폭 성장했으며 월드컵, 미군 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사망 사건 등으로 형성된 민족주의 무드가 변화의 흐름을 촉진시켰다.
연세대 김주환(金周煥) 교수는 "1987년 6월 항쟁을 경험한 386세대를 중심으로 냉전 이데올로기가 먹혀들지 않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고려대 김병국(金炳局) 교수는 "이번 선거는 낡은 정치 타파를 바라는 2030 세대(20, 30대)의 열망이 분출됐다는 점에서 세대 교체란 시각에서 먼저 봐야 한다"면서도 "진보세력이 확대돼 보수세력에 육박할 정도의 힘을 갖게 됐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이어 "앞으로는 정책의 성패에 따라 보수와 진보가 저울추처럼 번갈아 우위를 점하는 보·혁 균형 구도로 발전해갈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김광덕기자 kd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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