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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모나미 인생 송삼석 (28)크리스마스의 추억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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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모나미 인생 송삼석 (28)크리스마스의 추억①

입력
2002.12.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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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크리스마스다. 해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나는 부산이 생각난다. 피난지에서의 크리스마스….부산에서 삼흥사에 다닐 때 나는 삼례초등학교 1년 후배로 국민은행장 은행감독원장 광주은행장을 역임한 송병순(宋炳循)씨와 자주 어울렸다. 이리공고와 해양대학을 졸업한 뒤 부산세관에서 일하고 있던 송 전 행장의 하숙방이 마침 영도에 있어 우린 자주 어울리며 타향살이의 외로움을 달래곤 했다.

사건은 1952년 12월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에 시작됐다. 나는 피난지에서 맞이하는 첫 크리스마스 이브를 그냥 보낼 수 없어 송 전 행장과 저녁때 집에서 술이나 한잔 하자고 약속했다. 그러나 송 전 행장은 밤이 늦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단 한번도 약속을 어긴 적이 없는 친구였다. 사고가 난 것은 아닐까, 세관에서 밀수선이라도 잡은 것일까…. 불안한 마음에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다 깜빡 잠이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자정 무렵 방문 두드리는 소리에 깨어 일어나 문을 여니 송 전 행장이었다. 그는 술에 취해 있었고 옷차림도 엉망이었다. 그가 이불 위에 털석 주저앉으며 "형님, 저 결혼합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나는 정신이 멍해졌다. 송 행장의 주변 일을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저간의 사정이 궁금했지만 송 전 행장이 술에 취한지라 일단 잠부터 재웠다. 다음날 아침, 송 전 행장으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은 나는 아연실색할 수 밖에 없었다. 전날 송 전 행장은 출근하자마자 나도 알고 있는 고향 선배로부터 저녁 초대를 받았다. 저녁 자리에는 그 선배의 여동생 3명도 참석했고, 송 전 행장은 선배 집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선배는 여동생들과 함께 술을 마시며 전쟁중에 타향살이의 외로움에 젖어있던 송 전 행장의 감성을 계속 자극했다. 결국 그는 고향 선배의 '강압성 권유'에 못이겨 둘째 여동생과 결혼하겠노라고 동의를 해버렸던 것이다.

술김에 한 말이었지만 송 전 행장으로서도 난감한 일이었다. 그러나 사태는 더욱 점입가경이었다. 송 전 행장이 내게 "결혼을 막아달라"고 통사정을 해대는 것이었다. 고향 선배와의 약속을 번복하고 하루 만에 결혼을 못하겠다며 내게 파혼 통보의 악역을 부탁하다니…. 하지만 외지에서 송 전 행장이 믿을 만한 사람은 고향 선배인 나밖에 없었던 지라 별 수가 없었다. 도리없이 내가 총대를 메기로 했다.

마침 나는 그날 그 고향 선배 집에서 저녁식사를 하기로 약속이 돼있었다. 나는 마음을 다부지게 먹고 선배 집으로 들어갔다. 조촐하지만 깔끔하게 차려진 식사에 고향 선배의 딱부러진 모습이 파혼 이야기를 꺼낼 분위기가 아니었다. 사실 고향 선배 집안도 만만치 않았다. 송 행장의 처형될 사람은 나보다 한 살 위였는데, 당시 1군사령관으로 있다가 비행기 사고로 숨진 김백일 장군의 미망인이었다. 고향 선배와 고향 이야기며, 전쟁 이야기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안주 삼아 술을 마시다 보니 취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술에 취하는 속도에 맞춰 파혼 통보 임무도 슬슬 잊혀져 갔다. 아니 아예 말을 꺼내지 않기로 작정했다는 것이 더 솔직한 표현일 것이다.

다음 날 '임무 실패'의 과정을 설명해주자 송 전 행장은 사태 수습이 어렵다는 것을 인정하는 듯했다. 두 사람의 결혼식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사실 송 전 행장도 신부감에게 전혀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20일쯤 뒤인 이듬해 1월 중순 결혼식이 거행됐다. 주례는 조병옥(趙炳玉) 박사였고 나는 축의금을 접수했다. 그런데 축의금 때문에 또 한바탕 소란이 벌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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