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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록](12)넥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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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록](12)넥스트

입력
2002.12.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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넥스트가 활동한 1992년부터 97년은 가요사상 전무후무한 댄스 음악의 시대였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뒤를 이어 10대들을 겨냥한 가볍고 빠른 랩 댄스 곡이 쏟아져 나왔다. 댄스와 음악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대척점에 서있던 록은 제일 먼저 패퇴했다. 아무도 록을 하지 않을 듯했다.하지만 88년 대학가요제 대상 수상팀인 무한궤도의 리더이자 90년 솔로 데뷔해 '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 '재즈 카페' 등으로 지극히 상업적 활동을 하던 신해철(34)은 보란 듯이 정기송(기타) 이동규(드럼)와 함께 넥스트(New Experiment Team)를 만들었다. 모두가 놀랄 만한 변신이었지만 신해철은 "중고등학교 때부터 프로그레시브 위주로 록을 듣고 밴드를 한 세대로서 당연한 결정"이라고 말한다. 솔로 활동은 "하고 싶은 음악을 하기 위한 생존전략이다. 어쨌든 음악은 음악이니까"라는 입장. 덕분에 넥스트 역시 남들이 하지 않는 음악, 지적이고 앞서가는 엘리트의 음악이면서도 상업적 배려를 아끼지 않는 음악이라는 두 얼굴을 갖는다.

넥스트는 이름처럼 새로운 실험을 지향했고 소재는 록이었다. 댄스에 맞서 록을 해보겠다는 것뿐 아니라 록의 다양한 변주들을 해 보이겠다는 뜻도 있었다. 세션맨이 낀 3인조에 당시까지 낯설었던 컴퓨터를 적극 활용한 것은 다분히 이전 록 밴드들을 염두에 둔 차별화 전략이기도 했다.

데뷔작 '홈'은 가족을 주제로 한 컨셉트 음반으로 '도시인' '아버지와 나' 등이 인기를 얻었다. 프로그레시브 색채가 진했지만 록의 모든 장르를 섭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듯 다채로웠다. 노랫말은 사변적이고 관념적이었고 때로 난해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음반은 100만장 가까이 팔렸다. "댄스를 싫어하든 록을 좋아하든 당시 가요계에 불만을 가진 계층을 규합했기 때문"이었다.

2집 이후로는 정공법을 택했다. 94년 4인조로 진용을 갖추고 95년 김세황(기타) 김영석(베이스) 이수용(드럼)으로 라인 업을 완성했다. 실험의 중심은 기술과 사운드로 옮겼다. "서양 음악과 가요의 차이는 소리의 앞뒤 개념, 입체성에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 차이를 알고 난 다음에는 서양 음악에 가까와지려 노력했다. 3집 때 영국 엔지니어와 작업한 데 이어 4집(97)은 아예 영국에서 후반 작업을 하며 사운드에 대한 인식을 바꿔 놓는 데 기여했다.

댄스가 위세를 더하면서 넥스트는 더 많은 사람들을 끌어 모았다. 반골 기질과 과격한 발언으로 이미지 메이킹에 성공한 신해철은 '교주' '마왕'의 지위를 얻었고 퍼포먼스를 중요시한 라이브 공연은 물론 음반도 모두 성공했다. 신해철의 이미지와 차별화 전략이 주효하긴 했어도 댄스의 점령기에 록으로 성공한 넥스트의 의의는 간과할 수 없다.

97년 11월 넥스트는 해산했다. "더 이상의 독야청청은 싫다"는 말과 함께. 신해철은 "빙하기의 공룡 신세로 음악적 지향이 같은 동료 밴드 하나 없이 내부적으로만 답을 구하려다 보니 깨질 수밖에 없었다"고 당시를 돌아본다. 90년대 초중반의 한국 록에 그나마 넥스트가 있어서 다행이랄 수도 있지만, 변칙과 실험을 지향한 넥스트만으로 그 시대를 설명할 수밖에 없다는 건 불행한 일에 틀림없다.

/김지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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