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 곳마다 이번 대통령 선거가 화제다. 당선자와 낙선자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 끝에, 변화의 속도에 놀란 얘기가 뒤 따른다. 돈과 조직이 분위기를 좌우하던 옛날 선거와 너무 달라져 믿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군중집회와 음식접대가 사라진 자리에 TV 토론과 인터넷 통신이 파고들어 일으킨 바람의 위력에 기성세대는 놀라고 있다.그러나 그 전에 더 큰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간과해 왔다. TV 토론에 나온 3명의 유력 후보는 전과는 너무 다른 사람들이었다.
한 평생을 정치판에서 늙은 '정치 9단'들이 물러간 자리를 전문 직업인 출신의 '정치 신인'들이 차지하게 된 것 자체가 엄청난 변화였다. 권위주의 같은 묵은 질서와 거리가 먼 그들의 등장은 50년 구태정치의 청산을 예고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단연 돋보이는 것은 노무현 당선자의 솔직함과 서민성이다. 그는 너무 솔직해서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치는 평범한 동창생이나 옆집 아저씨, 또는 친구 삼촌이나 동생 친구 같은 이미지다. 너무 꾸밈이 없어 손해를 보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의 고백 에세이집 <여보 나좀 도와 줘> 첫 머리는 "변호사는 그렇게 해서 먹고 사느냐"는 사건 의뢰인의 항변으로 시작된다. 변호사 개업 초기 사기혐의 구속자 사건을 맡았는데, 며칠 뒤 합의가 됐으니 수임료 60만원을 돌려달라는 요구에 불응하자, 구속자 부인이 그런 말을 하고 갔다는 것이다. 사무실에 돈이 떨어져 어쩔 수 없었지만, 화살처럼 가슴에 꽂힌 그 말 때문에 오래 고통에 시달렸다는 고백이다. 여보>
이 책에는 가난한 집안 사정 때문에 중 고교 진학 때마다 겪은 고통과 대학을 포기한 슬픔, 새 필통이 탐나 어수룩한 친구를 꼬여 필통을 바꾸었다가 창피당한 일등이 진솔하게 묘사돼 있다.
좋은 책가방 가지고 다니는 아이가 샘 나서 체육시간에 교실 당번을 서며 면도칼로 책가방을 그었던 비행, 교내 서예대회 때 심사의 공정성에 항의하기 위해 2등상을 반납했던 반항아 기질까지 숨기지 않았다.
고교 때부터 술 담배를 배웠고 성적은 중간 이하였으며, 젊어서는 부부싸움을 자주 했고 간혹 손찌검도 했다는 발가벗은 고백이 친근감의 원천이 아닐까.
물론 그 뒤 생각이 바뀌어 이해와 영욕을 가리지 않고 옳다고 믿는 일을 밀고 나가다 바보 소리까지 듣게 되었다는 것이 이 책의 큰 줄거리다. 누구나 숨기고싶은 그런 일들을 털어놓은 것이 바로 신뢰의 단서이기도 하다.
차마 털어놓기 어려운 것을 다 말해버린 사람에게 무슨 속셈이 있으랴 싶어지는 것이 듣는 사람의 마음이다.
마찬가지로, 성급하고 경솔했던 일들도 숨기지 않았다. 3당 합당 때 정치스승 김영삼을 불필요하게 '악담'을 한 일, 89년 명분없는 의원직 사퇴와 10여일간 잠행끝의 번의파동 등을 경솔함의 사례로 제시했다. 그런 성급함은 선거운동 기간 "깽판 친다" 같은 비속어로 나타나 표를 잃기도 했다.
그것을 의식한 때문일까, 당선 제일성은 뜻 밖이었다. 역전승이 굳어진 19일 늦은 밤 민주당사에 나타난 그는 소감을 묻는 기자들에게 대통령이 되었으니 천천히 한발 한발 나아가겠다고 말했다. 제주도 휴가에서 돌아와23일 선대위 회의에서는 "개혁적인 인물이라고 불안해 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내각은 안정적으로 운영하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바로 그것이다. 국민에게 약속한 대통합과 화합을 이루려면 불안해 하는 사람들을 안심시켜 입을 다물게 하는 일이 급선무다. 솔직하다는 인상과 천천히 한발 한발 나아가는 자세에 믿음이 실리면, 변화는 반 이상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 없다.
문 창 재 논설위원실장cjmoon@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