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지구촌은 불안과 침체의 한 해였다. 아프간 전쟁 승리의 여세를 몰아 대 테러전의 기치를 높이 세운 미국은 유일 초강대국의 힘으로 이를 시대의 조류로 만들었고, 이에 맞선 테러 세력들의 저항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유럽을 가리지 않고 세계 곳곳을 불안에 떨게 했다.북미 대륙은 줄 이은 기업회계 부정과 파산으로 멍들었고, 유럽은 유로화 전면 유통에도 불구하고 경제가 지지부진했으며, 일본도 장기불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등 세계 3대 성장 엔진이 모두 침체를 면치 못했다.
아시아에서는 중국 지도부의 세대 교체가 이루어졌고, 남미에서는 좌파 정권이, 유럽에서는 우파 정권이 속속 들어서는 등 정치적 지형의 변화도 있었다. 에이즈로 피폐해진 아프리카에서는 오랜 내전들이 종식돼 그나마 위안을 주었다. 올 한해 지구촌의 기상도를 대륙별로 정리해 보았다.
■북미 / 부시 중간선거 승리, 스나이퍼 연쇄살인
지난해 9ㆍ11 테러의 그림자는 올해에도 짙게 드리워졌다. 10월 수도 워싱턴 일대를 공황으로 몰고갔던 스나이퍼의 무차별 연쇄저격 사건은 미국민에게 테러가 지구 반대편이 아닌 초강대국의 심장부에서 일어날 수 있다는 공포를 다시 한번 각인시켰다.
탄저균 살포 등 테러에 대한 공포는 미국을 거대한 감시 체제인 ‘빅 브라더’ 사회로 몰고 갔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공화당은 경제 침체에도 불구하고 대테러 강경책을 바탕으로 11월 5일 중간선거에서 압승을 거뒀다. 집권당의 상하원 석권은 1934년 이래 처음이었다.
■유럽 / 유로화 시대와 EU 확대
유럽은 올해도 통합을 위한 항해를 계속했다. 1월 1일을 기해 유로화를 단일 통화로 통용시키며 ‘경제 통합’에 나선 유럽연합(EU)은 12월 13일 정상회의를 통해 중ㆍ동유럽 10개국 신규 가입을 공식 승인함으로써 동서 유럽을 아우르는 ‘유럽 통합’의 깃발을 올렸다.
5월 최대 위협이었던 러시아까지 북대서양조약기구의 틀 안에 끌어들인 EU는 내년 6만 규모의 신속대응군까지 창설, 세계 최대 시장에 독자 방위력까지 갖춘 차세대 슈퍼파워를 꿈꾸고 있다.
■중동/ 이라크 무장해제냐 전면전이냐
올 초 아프간전이 사실상 막을 내린 이후 미국의 총구는 이라크를 겨냥했다. 대량살상무기를 지속적으로 생산, 테러 집단에게 유포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국제적인 반전 여론이 끊이지 않고 있지만 미 행정부의 일관된 전쟁 의지는 11월 8일 이라크의 무장해제를 요구하는 새 유엔 결의를 이끌어냈다.
지난달 재개된 유엔의 무기사찰이 진행 중이지만 미국은 “이라크가 세계를 속이고 있다”며 사실상 전쟁 수순에 돌입한 상태다. 힘을 바탕으로 한 미국의 일방주의 정책에 대한 국제적 비판 여론도 높아졌다.
■남미 / 경제 위기와 좌파 도미노
경제위기의 해법은 ‘좌향좌’일까. 1998년 시작돼 결국 디폴트(국가 부도) 선언까지 이어진 아르헨티나발 경제위기는 인접국까지 차례로 전염시키며 올해 남미 전체를 ‘파산 대륙’으로 몰아넣었다.
널뛰는 환율, 살인적인 인플레 속에 상당수 국가는 자국 통화를 포기하는 강수로 맞섰지만 빈부격차의 박탈감 속에 민중의 분노는 21세기형 좌파 정권의 도미노 현상을 빚어냈다. 10월 브라질의 루이스 이냐시오 룰라 다 실바, 11월 에콰도르의 루시오 구티에레스 당선은 베네수엘라, 아르헨티나, 칠레의 좌파 정권에 더해 지금 남미를 붉게 물들이고 있다.
■동북아시아 / 북한발 불안, 일본발 침체, 중국발 변화
10월 초 방북한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차관보를 통해 알려진 북한의 농축 우라늄 핵 개발계획은 이전까지 대부분 이라크로 집중되었던 세계의 관심을 한순간에 한반도로 옮겨놓았다.
10년 장기 침체에서 헤어날 줄 모르는 일본의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내각은 9월 역사적인 북일 정상회담에 이은 국교 정상화 협상으로 일대 전기를 노렸으나 북한의 핵개발과 일본인 납치 및 타살의혹 등 잇딴 '고백 외교'로 이마저 진퇴양난에 빠졌다.
중국 공산당은 11월 16차 전국대표회의를 통해 장쩌민 국가주석과 주룽지 총리 등 3세대가 물러나고 당 총서기에 후진타오 부주석을 선출, 후진타오 시대의 공식 개막을 알렸다.
■러시아 / 강대국 유지의 몸부림
냉전 종식 이후 내리막길을 걸은 러시아에게 올해는 전기의한해였다. 미국 주도의 대테러전에 적극 협력 의사를 밝힌 러시아는 5월 미국과 동반자 선언, 나토 준회원국 가입을 통해 군사대국의 명분을 버리고 수많은 경제적 이권을 확보했다.
10월 체첸 반군의 모스트바 문화센터 극장 인질극 강경 진압 과정에서 대규모 인질사상과 독가스 살포로 비난받았지만 이 또한 대 테러전의 필요악으로 무마했다.
■동남아시아/ 테러 새 거점으로 부상
9·11테러를 기독교와 이슬람의 문명 간 충돌로 분석하는 이들은 세계 최대의 회교도 거주지역인 동남아를 일찌감치 테러의 새 본부로 지목했다.
10월 21일 세계적인 휴양지 인도네시아 발리섬을 뒤흔든 9ㆍ11 테러 이후 최대 규모 테러는 동남아시아 테러거점화의 상징이었다. 호주, 영국 등 외국인이 주로 찾는 나이트클럽을 자폭 테러로 191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했다. 인도네시아 당국은 알 카에다 테러조직과 연계된 제마 이슬라미야(JI)를 배후로 지목, 전세계는 다시 한번 알 카에다 망령을 보았다.
■아프리카/ 53개국 아프리카연합 출범
21세기에 들어서도 빈곤과 분쟁의 오명을 벗지 못하고 있는 아프리카는 올해 통합을 위한 중요한 발걸음을 내디뎠다. 유럽연합을 본떠 53개국의 연합체로 7월 출범한 아프리카연합(AU)은 분쟁 종식과 민주화, 빈곤 추방을 목표로 내걸었다.
하지만 “늙은 독재자의 사교클럽은 되지 않겠다”는 초대 의장 타보 음베키 남아공 대통령의 일성에도 불구하고 정치 경제적 통합은 험난하기만 하다.
김용식기자 jawohl@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