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오후, 부모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어린이 48명의 보금자리 화성영아원(서울 성동구 하왕십리동)에는 인기척 조차 없었다. 동장군이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면서 아이들은 실내에 갇혀있다시피 하는데다 연말이면 찾아오던 방문객들도 뚝 끊겨, 마당은 썰렁하기만 하다. "옛날엔 연말이 되면 정치인이며 누구며 할 것 없이 선물보따리를 싸들고 찾아오는 사람들로 북적댔는데, 요즘은 통 찾아볼 수 없다"는 이형숙(88) 원장은 겨우살이 걱정에 시름만 깊어간다.■막막한 소외계층들
고아원 양로원 등 복지시설의 올 겨울맞이가 유독 매섭고 쓸쓸하다. 복지시설에 수용된 노인, 고아, 장애인, 노숙자 등 소외계층은 공식 집계된 것만도 7만8,000여명. 그러나 이들은 찾아오는 방문객도 거의 없고 후원의 손길도 뜸한 가운데 더욱 지독한 소외감에 시달리고 있다. 해마다 이맘때면 특별한 관심을 쏟아주는 '연말 특수'는 물론이고 '대선 특수'도 기대와 달리 전혀 없는 상황이다.
천사요양원(서울 강서구 화곡동)의 무의탁노인 140명은 서럽고 무료한 겨울을 맞고 있다. 지난해 이맘때는 약 10군데서 찾아와 짧은 한때나마 외로움을 달래주었지만, 올 겨울 들어서는 개인이나 단체 방문객이 단 한 차례도 없었다. 박은진 원장은 "찾아오는 친인척도 없어 사람을 그리워하는 어르신들이 많다"며 "혹시 한 표를 의식해 방문하는 사람이라도 있을까 기대했으나 전혀 없어서인지 실망이 여간 큰 게 아니다"라고 전했다.
선거와 무관했던 아동 수용시설들은 아예 누군가 찾아올 거라는 기대 조차 하지 않았다. 정신지체아 105명이 수용된 동천의 집(서울 노원구 하계동)은 봉사활동 점수를 받으려는 중고생 봉사자들만 찾아올 뿐 사람 구경이 힘들 지경이다. 아이들에게 줄 크리스마스 선물을 직접 준비하고 있는 화성영아원 이소영(李素英) 부원장도 "부모가 있어도 찾아오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씁쓸해 했다. 크리스마스때마다 찾아와 이벤트를 열어주던 후원자가 올해도 찾아올지는 미지수.
복지시설 관계자들은 "연말이나 대선이라고 해서 달라진 것 없이 평상시와 똑같다"고 입을 모은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찾아오는 사람 없이 '고립된 섬'처럼 지낸다는 얘기다.
■ 휘청거리는 복지시설
장애아동시설 상락원(서울 종로구 안암동)의 곽선우씨는 "난방비며 아이들 병원비며 다른 때보다 25%정도는 더 돈이 들어간다"며 겨울나기 걱정에 한숨을 내쉬었다. 정부 보조금과 매달 후원자들이 보내주는 후원금 이외의 수입원이 없어 추가 경비를 충당할 일이 요즘 최대의 고민거리다.
수십,수백명의 생활을 책임지는, 소외계층 복지시설의 살림살이는 겨울 추위가 들이닥치면서 더욱 빠듯해지고 있다. 노인, 아동, 장애인 등 신체적으로 허약한 이들이다보니 난방비나 병원비가 급증하기 마련. 시설 운영자들이 의례적인 연례 행사여도 연말 특별 방문객을 기다리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러나 올겨울 복지시설 대부분은 정부 지원에 의존해 근근이 운영되고 있는 실정이다. 한 복지시설의 관계자는 "정부 보조금 이외에는 안정된 수익이 없다는 점이 재정상태를 더욱 부실하게 만드는 요인"이라며 "후원자, 기부단체나 공동모금 등 재원을 조달할 수 있는 다양한 통로가 있어도 그림의 떡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화성영아원의 경우 50명에 가까운 아이들을 위해 매달 꾸준하게 후원금을 보내는 독지가는 10명 안팎에 불과하다.
몇천원씩, 몇만원씩 들어오는 후원금은 IMF때 줄어든 이후 회복의 기미 조차 보이지 않는다. 대신 조금이라도 경제 침체 기미가 보이면 후원은 끊기기 일쑤다. 장애아동시설 은광원(인천 부평구 부개동) 관계자는 "경제적으로 조금만 어려워져도 소외시설은 쉽게 잊혀진다"며 '보다 어려운 이웃을 배려하지 않는 세태'를 한탄했다.
/문향란기자 iami@hk.co.kr
강철원기자 strong@hk.co.kr
■ 사회복지시설 실태
양로원 고아원 장애인 등 정부 인가 사회복지시설은 900개로 모두 7만8,625명이 수용돼 생활하고 있다. 이 가운데 남자가 4만1,107명이고 여자가 3만7,518명이다.
이들 소외계층은 1990년 8만여명에서 점점 줄어들다 IMF를 거치면서 99년 8만2,590명까지 늘었으나 경제상황 개선으로 점차 줄고 있는 추세다.
시설별로는 고아원 등 아동복지수용시설이 273개 1만8,808명, 양로원 등 노인복지수용시설 278개 1만4,000명, 장애인복지수용시설 200개 1만7,331명, 정신질환자 요양시설 55개 1만2,676명, 부랑인시설 37개 1만1,152명 등이다. 이밖에 당국의 허가 없이 운영되는 미신고시설도 무려 1,000여개, 인원도 1만7,000여명에 달해 모두 10만명에 육박하는 인원이 사회복지시설에서 생활하고 있는 셈이다.
미신고시설은 말할 것도 없고 정부 인가시설도 정부지원금이 최소한의 생활을 유지하는 수준에 그치기 때문에 사회단체나 개인의 기부금 지원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단체나 개인의 기부가 연말이나 명절 등 일회성에 그치고 있어 대부분 시설들은 사실상 전적으로 정부지원에 의존하고 있는 형편이다. 사회복지시설 태반이 회계처리가 불투명해 정부보조금이나 기부금 횡령이나 유용 같은 잡음도 끊이지 않은 점도 기부행위를 가로막는 한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복지부는 이에 따라 올 1월부터 영수증 등 회계처리를 투명하게 하고 이를 시·도에서 관리토록 하는 등 기부금 집행을 엄격 감독하고 있다.
한편 '아름다운 재단'이 올 8월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정기적 기부 경험자는 응답자의 18%에 불과하고 평균 기부금액도 5만원대에 머물고 있어 정기적 기부자 확보가 사회복지시설의 우선 과제인 것으로 나타났다.
/정진황기자 jhchung@hk.co.kr
■ "동천의 집" 장애란 원장
"한 끼 식비 900원, 한명 당 한 해 의복비가 6만7,000원…."
서울 노원구 하계동 지체장애아 사회복지시설 '동천의 집' 장애란(張愛蘭·50·여·사진) 원장은 연말이 다가오면 시름만 깊어진다. 날씨가 차가워지고 캐롤이 울릴때면 아이들이 유난히도 손님을 기다리는데 누구 하나 찾아오는 이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정부지원은 턱없이 부족하고 몇 년 전부터는 묵묵히 후원해주던 독지가들의 발길도 뚝 끊어져 속만 끓이고 있는 형편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하루 식비 2,700원으로는 세끼 밥 먹이기도 벅차고, 1년 의복비 6만7,000원으로는 겨울외투 하나 사기도 힘들어요." 장 원장은 "난방비 지원이 넉넉치 않아 영하의 날씨에도 하루 세 차례만 방을 덥히고 있는 실정"이라며 "침대라도 있었으면 아이들이 추위에 떠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장 원장은 "생필품 보급도 제대로 안 되는 마당에 '소외 어린이 복지증진'이라는 구호는 야속하기만 해요"라며 원망을 쏟아냈다.
그래도 묵묵히 아이들과 동고동락하는 직원들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직원들은 하루 13∼14시간씩 일하면서도 하루 밤에도 수 십번씩 깨는 아이들의 손을 일일이 잡고 화장실로 데려가야 하지만 불평 한마디 없다.
105명의 지체장애아를 수용하는 이곳의 법정직원 인원은 68명이지만 정부가 지원하는 예산은 실제 48명분에 불과하다. 특히 아이들을 직접 가르치는 생활재활교사는 20여명이나 부족한 실정.
장 원장은 "고된 일에도 직원들 급여가 일반 공무원의 60% 수준에 불과하다"며 "소외계층에 남달리 관심이 많은 분이 새 대통령이 된 만큼 사회복지시설에 대한 예산증대와 직원들의 처우개선에도 힘써달라"고 당부했다.
/강철원기자 str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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