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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한인 이민 100년史 / 가난이 싫어 "돈나무 있다"는 하와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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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한인 이민 100년史 / 가난이 싫어 "돈나무 있다"는 하와이로…

입력
2002.12.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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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12월 22일, 미국 증기선 게일릭(Gaelic)호가 새벽 어둠을 찢는 긴 기적소리를 울리며 제물포항을 출항했다. 미주 한인 이민사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음이었다. 이 배의 3등석칸에는 56명의 남자와 21명의 아낙, 25명의 어린이 등 총 102명의 한인들이 미지의 신천지인 하와이에 대한 기대와 불안으로 몸을 뒤척이고 있었다.▶가난으로 버린 조국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이역만리로 이들의 등을 떠민 것은 지독한 가난이었다. 특히 1901년과 1902년, 전국을 휩쓴 가뭄과 홍수는 땅에만 목숨을 부지하고 살던 많은 농민들을 유랑민으로 만들었다. 마침 이 때 먼저 이주한 일본인·중국인 노동자들의 노동쟁의로 골치 아파하던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주들이 한국으로 눈길을 돌렸다. 이들은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자 모집'을 알리는 광고를 전국에 뿌렸고 대한제국도 수민원(輸民院)이라는 인력수출기구를 만들어 이를 후원했다.

당시 모집광고지는 "하와이는 기후가 온화해 극심한 더위와 추위가 없고 무료 교육을 받을 수 있으며 일년 내내 어떤 절기든지 직업을 얻기가 용이하다"고 적고있다. 이 광고지는 "하와이는 나무에도 돈이 열린다"는 소문과 함께 퍼져나갔고 지원자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사진신부행렬

첫 배가 도착한 후, 1905년 일제에 의해 하와이 이민이 금지되기까지 총 7,226명이 하와이에 도착했다. 이중 80%이상이 남자들로 이들의 생활이 안정돼갈 1910년 무렵부터는 결혼문제가 이민사회의 가장 중요한 이슈로 떠올랐다. 이에 따라 등장한 것이 소위 '사진신부(Pictue Bride)'들. '사진신부'란 중매쟁이가 건네준 남편감의 사진만을 들고 하와이로 시집온 여자들을 가리키는 말로 1910년부터 24년까지 951명의 신부들이 하와이로 시집갔다.

▶성공적인 정착

'아메리카로 가는 길'의 저자 웨인 패터슨은 사진신부들이 초기 이민자들의 성공적인 정착에 큰 기여를 했다고 지적했다. 남편들은 부인에 대한 미안함으로 더욱 열심히 일을 했고, 부인들은 자식교육에 앞장서 훗날 2·3세들이 성공하는 데 밑거름을 쌓았다. 하와이 이민이 시작된 후 100년이 지난 지금 미국 한인사회는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규모와 위치로 성장했다. 사탕수수 노동자들의 눈물과 땀이 지금 한인사회가 누리는 지위의 기반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런 의미에서 1902년 12월 22일 찬 새벽 바람을 뚫고 게일릭호의 갑판에 오른 102명의 한인들은 '한국 이민사의 콜럼버스들'이었다.

/김기철기자 kimin@hk.co.kr

● 독립운동 결실 仁荷大

인하대(仁荷大)는 초기 하와이 이민자들이 벌여온 독립운동의 결실이다. 1952년 하와이 이민 50주년 기념으로 당시 이승만(李承晩)대통령이 독립운동시절 하와이 이민자들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 설립한 것. 인하대라는 이름 자체가 인천의 '인'자와 하와이의 '하'자의 합성어다. 물론 대학 설립비용도 이 대통령이 해외 독립운동을 하면서 이민자들로부터 받은 독립운동 자금 중 사용하고 남은 돈이 종잣돈으로 쓰였다.

하와이 이주민들은 조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후 해외 독립운동 기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인하대는 이후 1968년 한진그룹 조중훈(趙重勳)회장이 재단을 인수하고 이사장에 취임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강철원기자strong@hk.co.kr

● 이민 후손들 현황

102명의 이민자가 1902년 12월 22일 게일릭호가 제물포항을 떠난 이후 일본의 반대로 이민이 중단된 1905년까지 하와이에 도착한 이민자는 총 7,226명이었다.

이민자들은 모두 3년간은 의무적으로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해야 했다. 하지만 계약조건이 풀리기 시작한 1906년부터는 이들의 직업이 다양해지기 시작했다. 또한 일부 청년들은 국내신문에 '신부구함'이라는 광고를 내고 사진으로만 선을 보고 아내감을 구해야했다.

1910년에 만들어진 한인회 명부를 보면 목수 목사 요리사 잡화점상 교사 등 다양한 직업이 나타난다. 또 일부는 이민간 지 10년도 안돼 특유의 성실성으로 농장 노동자에서 농장주로 변신한 경우도 있다.

하와이 이주민들은 조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후 해외 독립운동 후원세력으로서의 역할도 크게 했다. 이들이 독립지금으로 보낸 액수만 300만달러가 넘는다. 당시의 일당이 70센트∼1달러였다는 사실에 비춰보면 엄청난 액수다. 초기 이민자들은 인종차별과 문화의 차이 속에 힘겹게 살아 갔지만 뜨거운 교육열 덕택에 후손들은 대부분 주류사회에 진출, 성공적인 삶을 꽃피웠다. 사탕수수 노동자의 후예 중 가장 성공한 인물로 꼽히는 사람은 하와이주 대법원장인 문대양(미국명 로날드 문·58)씨다.

/김기철기자

우리는 황금이 열리는 섬으로 간다

- 하와이 이주 100년의 노래

이근배 (李根培·한국시인협회장)

하늘이 흐리다

동짓바람이 바다를 깨우며 운다

기우는 나라가 더 춥다

살길 찾겠다고 죽창 들고 일어선

동학농민들의 피흘림도 헛되이 무너지고

날세운 일제의 발톱 앞에서

반천년 조선왕조가 떨고 있다

흉년으로 바닥난 농촌살이

굶주린 배를 웅켜쥐고만 있을 때

이 무슨 하느님의 동아줄인가

바다 멀리 하와이섬이 손짓하고 있었다

"여기로 오라

황금이 열리는 달콤한 수수밭이 있다"

땅없고 기댈 곳 없는 흰옷의 사람들

인천 앞바다로 모여들고 있었다

백년전 오늘 동짓날

긴 뱃고동소리와 함께

사랑과 눈물을 내 어머니의 땅에 뿌리며

백 두명의 장정들이 조국을 떠나고 있었다

황금보따리를 들고 와서

내 부모 형제 배불리고

잘사는 나라도 만들어 보겠다고

무지개를 좇는 어린 아이처럼

파도가 귀를 넘으며 달려드는

겨울 태평양을 건너고 있었다

소처럼 일해서 정승처럼 쓰랬다지

나라를 되찾아야 우리가 돌아가지

사탕수수밭에서 피땀을 흘린

한 달 품삯 30달러를

반으로 뚝 잘라 독립자금으로 내놓는다

손과 발이 닳아서 터지고

땡볕에 얼굴이 검게 타들어가도

고개를 내밀고 조국만을 바라보던

어머니 계신 곳에 머리를 두고 잠을 자던

가슴 뜨거운 흰옷의 사람들

핏줄은 올곧게 지켜야지

내 나라 여자 데려다 장가들고

아들딸 낳고 뿌리내리며 살았구나

푼푼이 모은 독립자금으로

해방이 되자 인천에 대학을 세우고

산 설고 물 선 이국땅에도

잘사는 한국인으로 우뚝 섰구나

해 뜨는 나라에서 해를 싣고

바다 저쪽 갔던 사람들

백 년 나라사랑 동쪽 해로 떠올라

오늘 이 나라의 아침을 밝히는 구나

이제 통일안고 두둥실 돌아오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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