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종합기계 양재신(梁在信·60) 사장은 엔지니어 출신 최고경영자(CEO)다. 1966년 서울대 기계공학과를 나와 대우종합기계의 전신 한국기계에 입사한 이래 엔지니어의 외길을 걸어왔다.그는 36년간 기계, 중공업, 자동차 등 제조업체만 거쳤다. 그래선지 그의 말문은 기술 강조로 시작됐다. "기술은 손으로 많은 시간 익혀야 쌓이고, 산업 경쟁력도 여기서 비롯됩니다." 그의 손에서 국내 최초로 공작기계가 만들어졌고, 한국형 장갑차, 디젤엔진 개발에도 그의 역량이 발휘됐다. 지금도 그는 해외 전시회가 있으면 모든 일을 제쳐두고 달려간다. 사장이 신제품의 기술을 훤히 뚫고 있는 기술자인 탓에 담당 직원들은 늘 긴장한다. 그는 대우차 사장을 지낼 때 '기술은 사오면 된다'는 당시 김우중 그룹회장과는 다른 시도를 한다. 누비라, 레간자, 라노스 등 3개 신모델을 동시 출시, 직원들에게 '현대차를 이겨보자'는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CEO만 10년째인 양 사장은 경영자로서도 장수하고 있다. '운 좋은 사람' '해결사'라는 별명도 갖고 있다. 대우차, 대우정밀, 대우기전 등이 그가 CEO일 때 전성기를 구가, 그가 맡으면 회사가 잘 굴러간다는 얘기다. '운이 좋다'는 말에는 '대우맨' 인 그가 대우사태 당시 경영을 책임질 위치에 있지 않아, 개인적 위기를 무사히 넘겼다는 뉘앙스도 포함돼 있다. 해결사란 닉네임은 M&A(인수·합병)로 몸집을 키워온 대우그룹에서 경쟁력이 취약한 업체를 정상궤도에 올려놓는 구원투수 역할을 충실히 했기 때문이다.
양 사장은 99년 12월 채권단에 의해 대우종합기계 CEO로 선정됐다. 대우중공업 기계부문에서 오래 일한 그보다 회사를 더 속속들이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게 무엇보다 큰 이유였다.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현금 만들기. 받을 돈은 반드시 받아내고 나갈 돈은 줄이며, 제품은 절대 손해보고 팔지 않고, 돈 안 되는 사업들은 과감히 접었다. 당시 경영 화두인 '현금흐름 중시'를 회사 사정에 맞게 변형시킨 셈이다. "망한 회사의 빚은 갚지 않아도 된다는 고객들에게 수금하기 위해 별도 팀을 만들고, 채권도 바로 현금으로 확보토록 하는 한편, 반대로 어음은 기간을 연장해 나갔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1,200억원을 마련, 회사를 살리는 종잣돈으로 활용했다. 경쟁사들이 퍼뜨리는 헛소문으로 인해 회사 신뢰도가 추락하는 아픔도 있었지만, 양 사장은 불안해 하는 고객들을 하나하나 찾아다니며 대우그룹과의 단절을 설명했다.
어려움을 돌파하는데 필요한 내부지원과 신뢰를 얻기 위해 그는 '투명 경영', '열린 경영'을 모토로 내걸었다. "차입은 절대 없다, 돈이 없으면 월급도 못 준다"고 채근했다. 2개월에 한 번씩 창원, 인천, 서울 등 사업장의 전직원을 대상으로 회사현실을 있는 그대로 털어놓는 경영설명회를 하며 도움을 구했다. 그 결과 3년간 한 건의 노사분규도 없었다. 초기 40여명이던 임원이 모두 퇴사했고, 임원 자리는 13개로 줄었다. 그러나 첫해 실적은 엉망이었다. 적자 700억원에 경영평가 D. 채권단의 경고가 이어졌다. "하지만 이 때 숨겨진 부실까지 털어낸 덕분에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2000년 10월 기업분할 이후 부실자산 상각 등으로 경영투명성과 자산건전성도 높아졌다.
굴삭기, 지게차, 공작기계 등 주력 사업부문에서 국내 마켓리더를 굳게 유지하면서 경영성과가 계속 개선됐고, 지난해 11월에는 대우 계열사로는 대우조선에 이어 두번째로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에서 탈피했다. 올해는 마진율이 높은 내수 비중의 증가와 5억 달러가 넘는 수출에 힘입어 1조500억원 대이던 차입금이 9,300억원 대로 줄고, 매출성장률을 상회하는 이익증가세가 예상된다.
양 사장은 "수익 악화가 우려되던 엔진사업부문도 올해 150억원 흑자가 예상된다"며 "채권단의 주인 찾기(매각작업)와 관계없이 세계적인 우량기업으로 성장할 토대를 후임자에게 마련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대우가 비록 한국경제에 누를 끼쳤지만, 각 사업이 살아나면 우리 경제에 기여한 바가 인정될 것"이라는 바람을 피력했다.
/이태규기자 tglee@hk.co.kr
■양재신 사장은 누구
1942년 전북 전주
1960년 전주고 졸업
1966년 서울대 기계공학과 졸
1993년 대우기전공업 대표이사
1995년 대우자동차 사장
1998년 대우정밀 사장
1999년 대우중공업 종합기계부문 사장
2000년 10월 대우종합기계 사장
■대우종합기계는
1937년 광산장비를 만드는 조선기계제작소로 시작한 대우종합기계는 우리나라 기계산업의 산실역할을 해왔다. 63년 한국기계공업으로 이름을 바꾼 뒤 76년 재봉기를 만드는 대우기계에 합병되면서 대우중공업으로 거듭난다.
그러나 99년 8월 계열사 채무보증으로 인해 대우사태에 휘말려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에 들어간다. 이후 2000년 10월 대우중공업에서 지금의 대우종합기계로 분할, 새 출범했다. 지난해 11월말 워크아웃에서 졸업해 홀로서기에 성공했다.
남아있는 구조조정의 과제는 서울 영등포 공장부지 매각, 한국항공우주(주) 지분 28% 매각, 그리고 '새 주인 찾기'이다. 매각작업은 자산관리공사(지분 35% 보유)와 산업은행(지분 22% 보유) 등이 추진하고 있다. 자본잠식에서 벗어나는 등 회사가 건실해지면서 미국의 칼라일 등이 인수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사업부문은 크게 4가지로 나눠진다. 먼저 건설중장비 부문의 굴삭기는 국내 1위로 현대중공업, 볼보코리아와 경쟁하고 있다. 96년 설립된 중국 옌타이 법인은 세계 유수 업체를 따돌리고 중국 굴삭기 시장에서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산업차량 부문의 지게차와 공작기계 부문의 선반 등도 국내 1위를 고수하고 있다. 건설중장비와 공작기계 부문은 세계 종합 5위권이고, 지게차는 7위권이다. 디젤엔진과 K-200계열의 장갑차를 만드는 방위산업 부문은 아직까지 수익성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올 11월말까지 매출 1조7,111억원, 경상이익 1,319억원으로 각각 전년동기대비 20%이상 증가했다. 하반기 들어 내수부진과 수출환경 악화에도 불구하고 당초 올해 목표액을 초과달성할 전망이며, 단가인상 등으로 수익성이 크게 개선되는 추세라고 회사측은 밝혔다.
/이태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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