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의 첫 인사는 정권 인수위 구성이다. 인수위의 기능을 어떻게 설정하고, 누구를 책임자로 하느냐를 정하는 게 그의 첫 인사 포석이다. 이낙연 당선자 대변인은 정책 중심의 인수위가 발족할 것이며, 인수위는 집행기능을 하지 않을 것 이라고 말했다. 노무현 정부가 국민의 정부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에 당연한 얘기 같지만, 정권교체의 고비고비에 있었던 인수위를 둘러싼 우여곡절을 돌아보면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다.■ 인수위는 이번을 포함, 모두 4차례 있었다. 인수위가 첫선을 보인 것은 1987년. 전두환 정권을 승계한 노태우 당선자는 서슬이 퍼런 5공을 의식, 인수위라는 용어자체를 쓰지도 못했다. '대통령 취임준비위'가 공식명칭 이었고, 당선된 지 한 달여가 지나서야 겨우 발족했다. 취임준비위는 사사건건 전두환 대통령측과 마찰을 빚었고, 이는 노태우 대통령이 적극적인 5공 청산에 나서게 된 하나의 요인이 된다. 준비위 위원장은 군 출신의 이춘구 노태우 후보 선거대책 본부장이 맡았다.
■ 92년의 김영삼 당선자 시절에도 인수위는 진통을 겪었다. 김 당선자는 비록 3당 합당을 통해 정권을 잡았지만, 인수위 명칭을 '정권인수위'로 하고자 했다. 자신이 끌고갈 정부가 노태우 정부의 연장선상에 있지 않음을 부각시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노태우 대통령은 이 명칭에 난색을 표했고, 결국 '대통령직 인수위'로 낙착됐다. 김 당선자는 인수작업의 상당부분을 아들 김현철씨가 중심이된 사조직에 의존, 화(禍)를 자초했다. 위원장은 정원식 전 국무총리.
■ 97년 첫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룩한 김대중 당선자는 이종찬 전 국정원장을 위원장에 임명하고, 의욕적으로 인수위에 임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IMF 환란을 맞은 당시 상황은 국가위기 였다. 인수위는 대통령직 인수라는 본연의 업무보다는, 경제위기를 수습하고 노사문제와 정부 구조조정 등에 적극 나서야 했다. 김영삼 대통령의 기능은 사실상 정지 상태였고, 인수위는 주요정책에 대한 집행기능까지 했다. 하지만 노 당선자는 그럴 필요가 없게 됐다. 안정 속에서 정부 인수작업에 나설 수 있다는 것도, 우리 정치가 조금이나마 진일보하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이병규논설위원 veroica@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