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때부터 화가가 꿈이었던 내가 '태양의 화가 반 고흐'를 읽은 것은 중학생 때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해서 세상이 분홍빛이다가 보랏빛이 되기도 하고 다음날엔 회색빛으로 보이던 시절이라 우연히 내 손에 들어온 '태양의 화가 반 고흐'는 한마디로 충격이었다. 학원사에서 펴낸 세계위인전집 중 한 권으로 기억되는데 가로쓰기로 돼 있고 삽화가 곁들여 있어서인지 들자마자 다 읽어버렸다.늦깎이 화가로 출발해 '보리밭 위를 나는 까마귀'를 마지막으로 그린 뒤 서른 일곱 나이로 자살할 때까지 10년 남짓 짧은 기간에 그 많은 그림을 그린 것에 놀랐고, 동생 테오와 주고받은 편지 사연에는 눈물을 흘렸다. 대인관계가 늘 힘들었고, 한 번도 인정을 받지 못한 그림과, 가장 가깝다고 생각했던 고갱과의 불화, 마침내 귀를 자르고 머리에 방아쇠를 당긴 절망적이고도 처절한 반 고흐의 일생!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내게는 절망이기보다는 화가가 되려면 꼭 닮아야 하는 일생인 것처럼 귀하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나는 귀를 자르거나 방아쇠를 당길 생각은 하지 않았으나 그림은 매일같이 그렸다.
책을 읽은 뒤 내 눈에는 고흐의 그림이 새롭게 비쳤다. 그리고 그때부터 가위질, 칼질하는 버릇이 생겼다. 고흐의 그림이면 잡지에 실린 컬러 그림이거나 신문에 난 흑백 그림이거나 눈에 들어오는 대로 면도칼로 자르고 가위질을 해댔다.
당시 대구의 중앙통에는 대형서점이 몇 개 있었다. 가끔 그 서점들을 기웃거리곤 했는데 컬러로 인쇄된 반 고흐의 그림이 월간잡지에 실려있는 것이 아닌가! 워낙 인쇄술이 떨어진 때라 아트지에 선명하게 인쇄된 고흐의 '상록수'는 내 가슴을 설레게 했다. 그러나 책을 살 돈이 없었다. 주인한테 그림만 찢어 팔 수 없겠느냐고 했더니 별 미친 녀석 다 보겠다면서 쫓아냈다. 이튿날 면도칼과 스케치북을 들고 다시 그 서점으로 갔다. 주인은 손님과 얘기 중이고 점원은 책 정리로 정신이 없었다. 점찍어 둔 잡지를 폈다. '상록수'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짙은 녹색의 상록수가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너울너울 춤추며 손짓하는 것 같았다. 스케치북으로 책을 가리면서 면도칼을 꺼냈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마침내 '상록수'는 내 스크랩북에 잘 모셔졌다. 스크랩북이 워낙 많아서 정확한 확인은 못했지만 그 스크랩북은 지금도 내 집 어느 구석에는 있을 것이다.
이 두 호 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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