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소위 우리사회의 메인스트림(주류)에 속한다는 사람들은 많은 것을 생각했을 것이다."20일 한 중진 정치학자는 전날 TV개표방송을 통해 거대정당 조직 등 막대한 정치적 자산을 보유한 이회창(李會昌) 후보가 단기필마나 다름 없는 노무현(盧武鉉) 후보에게 맥없이 밀려 패배하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받은 충격을 이렇게 표현했다.
노무현 당선자의 승리는 기존의 시각이나 정치상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변화가 우리 사회에 밀려와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이번 대선은 지난 30년간 한국정치를 좌지우지해 왔던 3김씨가 직접 영향을 미치지 못한 최초의 선거였다. 그리고 지역기반, 금권·관권, 조직동원, 흑색선전 등 구 정치의 중요한 수단들이 더 이상 힘을 못쓴 선거이기도 했다. 이는 3김 시대의 물리적 종언과 함께 계보와 1인 보스 체제를 골간으로 하는 '3김식 정치'도 실질적으로 막을 내리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같은 변화의 저변에는 세대교체라는 큰 흐름과 함께 인터넷과 미디어를 활용한 새로운 정치문화가 자리하고 있다. 고려대 임혁백(任爀伯·정치학) 교수는 "전전(戰前) 세대에서 전후(戰後) 세대로 권력이 이양되는 세대간 정권교체가 이뤄졌다"면서 "이러한 세대 교체는 유럽, 중국, 일본에 비해 우리가 늦은 편이며 이제야 그 세계사적 흐름에 동참하게 됐음을 뜻하기도 한다"고 평가했다.
이러한 세대교체의 흐름은 당장 정치권에서 인적인 교체를 추진하는 지속적인 힘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인적 교체의 직접적인 결과는 여야 각 당의 내부 개혁작업 및 2004년 총선에서 구체적인 형태를 드러낼 것으로 예상된다. 2004년 총선은 또 지금까지 지역을 기반으로 한 정당 구도가 이념·정책형 정당 구도로 재편될 수 있을지를 가르는 분수령이 될 것이다. 정치권의 물적 토대에도 변화가 불가피하다. 민주당 국민참여경선을 통해 대선 후보가 됐던 노 당선자는 네티즌들의 폭발적인 성원을 받으면서 유세장에 동원이 아닌 자발적 청중들을 불러 냈다. 국민 정치참여의 새로운 형태를 개척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젊은 세대의 힘이 정치 문화를 바꾸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또 '희망 돼지 저금통'모으기 등을 통해 20여만 명으로부터 70억원을 모금한 것은 정치자금의 수요와 공급 흐름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켜 깨끗한 정치로 진입하는 단초를 마련한 것으로도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노무현식 정치 문화'에는 돌발적인 여러 가지 위험요소가 내재돼 있다. 우선 급격한 세대 교체가 이뤄질 경우 촉발될 수 있는 사회적 긴장감이 문제다. 정치권 등 우리 사회의 핵심 조직과 기관에서 권위와 리더십의 공백으로 인해 불안정성이 증대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세대간 충돌을 완화하면서 세대교체의 불안정성을 줄여 나가는 것은 노 당선자의 중대한 과제중의 하나다.
노무현식 대중정치, 또는 노무현식 국민참여정치가 포퓰리즘, 즉 인기 영합적 군중 정치에 빠져들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남북관계, 재벌문제 등 정책적인 면에서 노 당선자의 입장이 사회적 갈등을 유발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지적에 비추어 보면 노 당선자가 대중적 인기에 연연할 경우, 이러한 갈등은 심각한 국론분열로 치달을 수 있다.
/고태성기자 tsg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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