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프랑스 파리의 팡테옹 신전 앞에서는 이색 행사가 있었다. 자크 시라크 대통령과 저명 인사들, 관중이 운집한 가운데 열린 작가 알렉산드르 뒤마 유해의 팡테옹 입성 기념식이었다. 그는 1870년 사후 고향인 프랑스 북부 빌레 코트레에 묻혀 있었다.팡테옹은 5세기부터 파리의 수호 성녀 생트 쥬느비에브와 성직자의 유해를 지하에 모셔온 중요한 수도원이다. 그런데 대혁명 이후 프랑스 공화국 이념에 기여한 위인들의 유해를 안치하는 곳으로 바뀌었다. 이곳에 묻힌 문학가는 볼테르, 루소, 위고, 졸라 그리고 1996년 이장된 말로 등 극소수다.
'삼총사'와 '몽테크리스토 백작' 등 역사소설로 알려진 뒤마는 '레 미제라블'의 작가 빅토르 위고와 같은 해에 태어났다. 위고의 유해는 1885년 국장으로 치러진 장례식 후 곧 팡테옹에 묻혔는데 왜 뒤마는 사후 132년이 지나서야 팡테옹에 들어온 것일까.
뒤마의 아버지는 프랑스 식민지 하이티 섬에서 프랑스 귀족과 아프리카에서 팔려온 노예의 아들로 태어났다. 노예 아내와 그에게서 난 자식들을 팔고 귀국한 아버지를 따라 프랑스에 온 그는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이집트 원정 등에 참가해 혁혁한 전과를 거두며 노예였던 어머니의 성을 따 뒤마 장군으로 불렸다. 그러나 알렉산드르가 태어난 해, 나폴레옹은 노예제도를 부활하고 다른 피부색끼리의 결혼을 금지하며 유색인 장교를 제거했고 뒤마 장군도 4년 후 목숨을 잃는다.
갈색 피부에 곱슬머리, 자신이 흑백혼혈임을 부인할 수 없는 알렉산드르 뒤마는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으로 받은 고통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었다. '몽테크리스토 백작'의 주인공 에드몽 단테스가 14년 동안 갇혀있던 감옥서 탈출, 복수한 것처럼 그 역시 부당한 사회에 복수라도 하듯 몽테크리스토라는 성을 짓고 창작에 매달려 역사소설뿐 아니라 희곡, 여행기, 회고집 등 무려 650권의 작품을 남겼다. 시라크 대통령은 작가의 할머니, 아버지의 생애를 상기하며 프랑스 공화국은 그의 조상이 노예로서 당한 치욕과 그가 어린 시절부터 겪은 불의를 사죄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유 평등 박애의 정신을 수호하며 프랑스 역사를 작품화한 위고, 졸라, 뒤마를 프랑스 공화국의 총사들이라 불렀다. 뒤마 유해의 팡테옹 이장은 공화파를 창설한 시라크의 정책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탄생 200주년 및 팡테옹 이장을 기념해 나온 책 가운데 작가가 8년 동안 집필한 '나의 회고집'과 그의 아버지에 관한 첫 전기 '뒤마 장군, 여왕의 용기병'은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뒤마를 발견하는데 도움이 된다.
조 혜 영 재불번역가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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