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盧武鉉) 민주당 후보의 승리가 확정되자 시시각각 한국의 개표 상황을 보도하던 외신들은 이번 대선이 한국 정치의 새 장을 여는 역사적인 출발점이 될 것이라는 데 이견을 달지 않았다.미국 뉴욕 타임스, 워싱턴 포스트를 비롯한 주요 언론들은 미군 장갑차에 의해 두 명의 여중생이 숨지면서 촉발된 반미 정서가 관련 미군들의 무죄평결로 급속히 전국으로 확산된 것이 이번 대선의 가장 큰 변수로 작용했다고 분석했다. 특히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대북 강경론이 한반도에서 비판받고 있는 상황에서 터진 여중생 사망 사건은 미국과의 관계 재정립을 강도높게 주창해 온 노 후보에게 결정적으로 유리한 국면을 만들어 줬다고 지적했다.
이와 함께 개혁 성향의 노 후보가 보수층의 지지를 받고 있는 이회창(李會昌) 후보를 누르고 한국을 이끌 새 지도자가 된 것은 한국민들의 정치 개혁과 변화의 요구를 반영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뉴욕 타임스는 노 후보의 승리는 반미 물결과 주한미군에 대한 반감이 최고조에 이른 상황에서 국가적 자존심에 호소한 것이 주효했다고 보도했다.
MSMBC는 "개표 결과는 세대 간의 싸움 양상을 그대로 보여주었다"며 "젊은 층은 노 후보에게 표를 던졌으며, 그들의 부모들은 이 후보를 지지했다"고 전했다. 또 "노 후보는 북한을 '악의 축'이라기보다는 굶주리고 파산한 동포가 사는 나라로 보는 한국의 젊은 층을 대변하고 있다"며 "북한을 고립하려는 미국의 정책에 반대하는 노 후보의 집권에 미 행정부의 관심은 높아질 것"이라고 보도했다.
미국 외에도 영국, 프랑스 등 언론들도 대체로 노 후보의 대통령 당선으로 향후 한국과 미국과의 관계는 변화가 불가피하다고 전망하고 한국이 미국에 무조건 "머리를 조아리지는 않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프랑스의 AFP 통신은 "노 후보의 당선은 북한을 둘러싼 한반도 정세에 엄청난 변화를 몰고 올 것"이라며 햇볕정책 계승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 통신은 "노 후보의 승리는 한국이 미국과 북한 사이에서 보다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미국도 한국에 무조건적인 충성을 기대할 수는 없게 됐다고 전망했다. 또 정몽준(鄭夢準) 국민통합21 대표의 갑작스런 지지 철회가 결과적으로 공동정권에 대한 부담을 떨쳐버리는 계기가 돼 노 후보의 정국 운영의 여지는 더욱 커졌다고 분석했다.
영국의 BBC는 선거 기간 중 계속됐던 반미 물결을 언급한 뒤 이로 인해 노 후보의 대미·대북관이 크게 부각됐다고 분석했다.
일본의 요미우리(讀賣)신문은 "남북 대화·협력을 중시하는 햇볕정책 계승을 내걸었던 대북 융화노선의 노무현 정권은 대북한 압력을 강화하는 미국과의 정책 조정이 최우선 과제가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또 "낡은 정치의 청산을 호소해 온 노 후보의 당선은 한국민 다수가 이회창 후보가 강조했던 안정보다는 급속한 변화를 선택한 것을 의미한다"며 "한국이 구질서로부터 신질서로 옮겨가는 전환기에서 20, 30대가 나라의 행방을 좌우하는 층으로서의 존재감을 키웠다"고 분석했다. 아사히(朝日)신문은 "노 후보의 승리에 의해 김대중 정권이 북한에 대해 표방해 온 햇볕정책은 차기 정권에서도 이어지게 됐다"고 기대감을 표시했다.
/워싱턴=김승일특파원ksi8101@hk.co.kr
도쿄=신윤석특파원 ysshin@hk.co.kr
황유석기자 aquariu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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