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숲'은 경기 분당의 '아파트 숲' 어귀에 마치 한 삽 부려 놓은 듯 남아 있었다. 삼태기를 엎어놓은 듯 제법 야산의 모양새를 갖췄고, 그 자락에 망태기 걸리듯 20∼30호씩 3,4개의 부락이 섰다. 10대째, 20대째가 눌러 사는 오래된 마을이고, 아직도 90여 가구 중 약 절반 가까운 주민들이 아파트 숲 위로 뜨고 지는 해를 보며 농사를 짓는 곳. 이제 '연꽃문화마을'로 변신중인 경기 성남시 중원구 하대원동 360번지 일대 여술마을(전래지명)이다.주민들은 하대원동이 되기 전의 행정구역인 여수동이라고 부르지만 엄밀히 따지면 여수'통'이다. 아파트 위세에 눌려 지난해 초 '동' 지위를 빼앗긴 것이다. 동네 앞 큰 길에 심야좌석버스가 다닌 게 10년 가까이 되지만 마을 안길에 아스팔트가 깔린 것도 불과 지난해의 일. 그래서 마을에는 아직 판자를 덧대 이은 대문에 재래식 화장실을 쓰는 집들이 널려있다. 최근 시에서 개축 허가를 내주면서 올 한 해에만 20호 가까운 집들이 건물을 새로 앉혔다. 한 주민은 "같은 그린벨트라도 다른 동네는 지 맘대로 집 수리 해가며 살지만, 여기는 지붕 처마 좀 늘리는 것도 눈치봐야 할 만큼 빡빡했다"고 말했다. 주민들은 그 원인을 여술마을의 지정학적 위치에서 찾고 있었다. 즉, 성남 구도심과 분당신도심의 한 중간지점이라는 것. "시청사 이전부지로 눈독을 들이면서 시에서 일부러 아무도 손을 못 대게 한 거지." 이유야 뭐든 여술마을은 아직 깡촌이다. 분당시장이나 인근 모란시장까지 자동차로 5∼10분이면 닿는 동네여서 오이나 상추 등 신선채소가 주업이지만 농사로 돈 모은 이는 예나 지금이나 없다고 했다.
19일 오전9시30분. 일찌감치 투표를 마친 주민들이 하나 둘, 마을 복판의 연꽃 비닐하우스 단지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연꽃 모종(구근) 분갈이 작업을 마무리 짓기로 한 날이다. "간만에 휴일인데 후딱 해치우고, 돼지고기나 좀 굽지." 여기저기서 맞장구가 들리는가 싶더니 마을 연꽃농사 총무를 맡은 홍언표(洪彦杓·45)씨가 나선다. "아직 돈도 한 푼 못 벌고선 먹기부터 하자구?" 웃자고 내뱉은 홍씨의 면박에, 모여 선 10여명의 주민들이 걸게 웃었다. 홍씨의 말처럼 이번 모종 1만 여 본이 여술마을의 첫 연꽃상품인 셈. 1월 말∼2월 중순 꽃을 피워낸 뒤 출하를 할 참이기 때문이다.
주민들이 연꽃 농사를 시작한 것은 지난 봄이지만, 마음을 모은 것은 지난해 7월부터다. "2,000∼3,000평 갈아봐야 연간 수입 1,000만원도 안되는 농사 대신에 다른 거 뭐 없냐"는 게 주민들의 입에 붙은 넋두리였다. 게다가 특색있는 마을을 가꿔 마을의 자존심을 지키자는 취지로 50대 안팎의 젊은이(?)들이 모여 근년에 만든 '여술문화마을 가꾸기 주민위원회' 멤버들의 특화사업 구상이 맞아 떨어진 것이다. 주민위 위원장을 맡은 이대열(李大烈·56)씨는 "원예 대가로 연꽃 단지 부지를 물색 중이던 구성호(具聖豪·66) 교수와 정말 우연히 인연이 닿은 거지요." 의기투합한 주민들과 구 교수는 공모를 통해 19명으로부터 1억원의 자본금을 모아 3월 합작 영농법인(법인명 연꽃나라)을 결성했다. 주주 가운데 일부가 자기 논 5,000평을 싼 값에 대여했다. 4월 마을 잔치를 겸해 심은 400여종 5만 여 포기의 연꽃은 6월부터 하나 둘 꽃망울을 내밀더니 7월부터는 희고 붉고 노란 꽃 대궐을 이뤘고, 소문이 나면서 인근 아파트촌 유치원 초등학생들의 견학 행렬이 이어졌다.
총무 홍씨와 구 교수 등 수 천만원대 '큰 손'도 있지만 주민 대부분은 100만원 안팎의 소액 투자자. 한 주민은 "단돈 만원이라도 내 돈이 들어갔다니까 정성이나 느낌이 다르더라"고 했다. 지난 여름과 가을에는 주주는 물론 일반 주민들도 함께 다리를 걷고 뻘밭을 누비며 함께 잡초를 뜯고, 꽃대를 다듬었고, 어김없이 숯불 돼지고기 뒤풀이 잔치를 벌였다. 여술마을은 10여년 전만 해도 서울서 고기 맛께나 안다는 축 가운데 모르는 이가 없었다는 '갈매기살(돼지 갈빗대 속살) 촌'이었다고 했다. "저기 아파트 보이지? 거기가 도살터였어. 그래서 고기가 싱싱해 고깃집이 꽤 많았지."
아스팔트 길 따라 주민들은 국화도 심었다. 올해 심은 게 6,000본, 100만원 남짓 되는 묘목값도 주민들이 살림에 맞춰 추렴했다. 성남시를 졸라 가로수용 벚나무 800그루도 얻어 심었다. 마을 이미지를 '문화마을 답게' 가꿔보자는 취지였다. 남일 보듯 하던 관에서도 차츰 관심을 보이더니 최근에는 동사무소에서 노지 연꽃밭 둘레에 관람대와 보행자도로를 지어주겠다며 예산을 신청하라는 연락을 주기도 했다. 외지에서 들어와 사는 이들도 전체 주민의 약 40%에 이르지만 월례 행사인 마을대청소 참여율은 70%대에 육박한다. 그만큼 단합이 잘된다.
어려움도 있었다. 최근 1,2년 새 전국적으로 그린벨트 해제 붐이 일면서 그와 무관한 이 마을 땅값도 제법 올랐다. 땅이 있고 없고, 또 많고 적고에 따라 주민들의 속내가 갈렸고, 농사 유무에 따라서도 생각들이 달랐다. 젊은 축들이 설치는 게 이유없이 싫은 이들도 있었다. "벚나무가 자라면 그늘이 져서 농사에 지장이 있다며 막으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하지만 차츰 마음을 여시겠죠." 마을 진입로를 따라 늘어선 벚나무 행렬은 그래서, 두어 군데 끊겼다가 이어져 있었다.
지금 이 변화가 마을로서는 실로 30여년 만의 변화라고 했다. 10년 전 분당 아파트촌이 들어선 초기, 거름 냄새나 통장의 마을방송 소음 민원 때문에 공무원들이 들락거리던 한 동안의 '어수선함'을 제외하면 그렇다는 의미다. 하지만 그는 "이 변화가 너무 늦은 것인지도 모른다"고 했다. 언제 포크레인이 들어와서 연꽃 밭을 메우고 농지에 집터를 닦을 지 모를 일. 그나마 실오라기처럼 남은 수도권 그린벨트에 대한 위협이 최근 더욱 거세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술 연꽃마을은 개발의 폭력 앞에 촛불 대신 연꽃을 들고 선 묵언(默言)의 시위인지도 모른다.
/성남=글·사진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 원예인 구성호 씨
마을 편에 서서 보면 구성호(사진) 교수는 이방인이다. 그런데 주민들은 그에게 마을 미래의 큰 축을 선뜻 내맡겼다.
구 교수는 대학(충북대 55학번)에서 원예를 전공한 원예인이다. 70년대 잠깐 신구전문대와 충북대에서 강의한 이력 때문에 주위에서 '교수' 호칭을 놓지 않고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원예사업가에 가깝다. 안 심어본 작목이 없다고 했다. 80년대에는 중동 건설붐을 따라 사우디아라비아에까지 나가 우리 채소 농장(당시에는 유명했다는 무궁화농장)을 경영하기도 했다. 중동전쟁 발발로 90년 귀국한 구 교수는 곧 바로 중국으로 건너가 곤명화훼단지 조성의 원년 주요맴버로 활약했다. "중국에서 거기 연꽃에 반했었나 봅니다." 우리 토종 연처럼 뿌리를 먹기 위한 채련(菜蓮)이 아니라 작은 종지에 키울 수 있는 화연(花蓮)이 많은데 그렇게 예쁠 수가 없더라고 했다. 온도만 맞춰주면 연중 꽃을 볼 수 있고 가습 기능과 공기정화까지, 아파트 생활에는 더없이 좋은 식물이기도 한 터. 그의 연꽃 종자 모으기가 시작됐다. 10여년 간 중국과 일본 네덜란드 중남미 등을 돌며 모은 종류가 약 400여종에 이른다. 만성 신부전증으로 일주일에 세 번씩 신장투석을 해야 하지만 요즘도 매일 아침 서울 송파구 집을 나서 여술 연꽃마을로 출근한다. 그에게 여술연꽃마을은 연구실이기도 하다. 그의 꿈은 수생식물, 특히 연꽃에 대한 정말 제대로 된 책 한 권을 펴내는 것이다. 그는 "나의 지식과 경험을 나누면서 마을 주민들과 함께 보람을 얻을 수 있어 더없이 행복하다"고 했다.
/최윤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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