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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선택 노무현 / 그가 걸어온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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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선택 노무현 / 그가 걸어온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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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2.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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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상고를 나온 '영남의 아들', 민주당 노무현(盧武鉉) 후보가 호남의 환호를 한 몸에 받으며 제16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평생의 꿈. 정치인 노무현은 동서간 지역주의 극복과 국민통합을 이렇게 표현해 왔다. 그러던 그가 마침내 56세, 정치입문 15년 만에 그 지난 했던 꿈을 성큼 현실로 불러들이는 새로운 역사의 시대를 열었다.■질적 변화를 거듭한 인생 역정

그의 인생 역정이 처음부터 원칙과 소신 위에 튼튼히 세워진, 준비된 정치인의 길은 결코 아니었다.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삶의 유일한 목표였던 학창시절이 그에게 있었다. 대학진학이 좌절된 뒤 세상에 대해 어금니를 악물고 출세의 방편으로 사법고시에 매달리던 젊은이가 바로 그였다. 그의 삶의 첫번째 질적 변화는 우연치 않게 맡게 된 시국사건 변론 때 받은 충격을 온 몸으로 감당해 내면서부터 이뤄졌다.

정치인으로서 소신과 명분을 지키다 점점 더 소수파가 될 수밖에 없었던 노 당선자는 2002년4월 이른바 '노풍(盧風)'으로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승리함으로써 삶의 두 번째 질적 변화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대통령 당선. 그가 나라를 책임지고 국민과 함께 일궈가야 할 새로운 변화가 이제 막 시작됐다.

■정치인 노무현

이번 대선에서 '3김식'낡은 정치의 청산을 외쳤던 노 당선자의 정치 역정은 김대중(金大中·DJ) 대통령, 김영삼(金泳三·YS) 전 대통령과의 만남과 헤어짐을 거치면서 그들을 극복하는 과정이었다. 부산의 인권 변호사로 활약하던 그는 1988년 YS의 발탁으로 부산 동구에서 13대 국회에 진입했다. 그러나 YS와의 인연은 짧았다. YS가 90년1월 3당 합당을 선언하자 노 당선자는 이를 '정치 야합'으로 규정, YS와 결별했다. 야당 중에서도 소수파로서의 험로가 시작된 것이다. '꼬마 민주당'에 남은 노 당선자는 DJ의 신민당과 통합, 91년9월 통합민주당을 출범시켰다. YS와의 결별이 DJ와의 인연으로 이어진 것. 그러나 92년 대선에서 패배한 DJ가 정계에 복귀, 95년 9월 국민회의를 창당하자 노 당선자와 DJ의 4년 여에 걸친 정치적 동행은 막을 내린다. DJ의 신당 창당을 야권 분열 행위로 본 것이다.

96년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라는 가장 좁은 무대에서 자신의 소신을 지탱해 나가던 노 당선자에게 97년 대선은 도전이자 기회였다. 그는 통추 내부의 격론 끝에 '3김 정치 종식'보다 '정권교체'에 우선 순위를 두게 된다. 이것이 당시 당선 가능성이 높았던 DJ와 다시 손을 잡는 계기가 됐다.

노 당선자를 정치 초년병 시절의 '5공 비리 청문회 스타'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 노동현장에서, 국회 상임위에서 종횡무진 활약하며 이해찬 이상수 의원 등과 함께 13대 국회의 '노동위 3총사'로 불리던 시절도 있었다. 이때 노동자 옹호를 위해 편향된 발언을 자주 한 것이 두고두고 그의 '과격성'을 입증하는 꼬리표가 된다. 노 당선자의 15년 정치경력 중 의정활동 기간은 불과 6년이다. 92년 14대 총선 때 'DJ 당'소속으로 출마했던 부산 동구에서의 재선 실패, 95년 부산시장 선거에서의 고배, 2000년 제16대 때 부산 북·강서을에서의 낙선 등. 노 당선자는 'DJ 당'이라는 이유 때문에 정치적 고향 부산에서 번번이 외면 당하면서도 지역주의 극복을 내걸고 고집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인권 변호사 노무현

66년 부산상고를 졸업한 노 당선자는 농협 시험에 낙방하고 삼해공업이라는 어망 회사에 취직했다가 한달 반 만에 때려 치우고 사법고시 공부를 시작했다. 직접 흙벽으로 지은 집에 '마옥당'(磨玉堂,옥을 가는 집)이라 이름을 붙여 공부방으로 썼다. 책값을 벌기 위해 울산 건설현장에서 날품팔이를 하다 이가 부러지는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정작 그가 고시에 합격한 것은 75년으로 그 사이 그는 34개월간의 군복무를 마쳤고 73년엔 8개월간의 '추근거림'끝에 동향 출신 권양숙(權良淑)씨와 결혼했다. 27세 때다. 당시 부인 권씨의 아버지에 대해선 좌익 경력을 둘러싼 시비가 있었다. 2년간의 연수원 생활을 거쳐 77년 대전지법에서 판사생활을 시작한 그는 7개월 만에 판사직을 그만 두고 변호사 사무실을 차렸다. 그러나 그는 처음엔 시국사건에 관심을 두지 않았고 등기업무 조세 회계 사건에 주력하며 주로 돈벌이에 신경을 썼다. 그러던 그가 81년 부산의 운동권 30여명이 좌경 학습을 하다 검거된 '부림 사건'의 변론을 맡아 '온 몸에 시퍼런 고문 상처와 변호사 조차 믿지 못해 슬금슬금 눈치를 보는 모습'을 보고 분노에 치를 떤다.

■방황하는 학생 노무현

노 당선자는 46년 경남 김해군 진영읍 본산리 봉하마을에서 과수원을 하던 아버지 노판석(盧判石·1976년 작고)씨와 어머니 이순례(李順禮·1998년 작고)씨 사이에서 3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6세 때 아버지에게서 배운 천자문을 다 외워 '노 천재'소리를 들었고 대창초등학교에서는 6년 내내 우등상을 탔다. 그러나 가난은 그에게 큰 굴레였다. 59년 진영중학교에 들어갈 때도 입학금이 없어 '외상으로'입학했다. 그렇지만 그는 중학교 1학년 때 이승만 대통령 생일기념 글짓기 대회를 불법선거운동이라며 백지동맹을 선동하는 등 당찬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중학교 3학년 때 조그만 복숭아 과수원마저 빚에 쪼들려 처분됐고 집안의 어려움은 더 심해졌다. 그는 오로지 장학금을 받기 위해 부산상고에 진학했다. 방을 얻을 형편이 못돼 교실 바닥에서 새우잠을 자기도 했던 그는 2학년 때부터 친구들과 어울려 술과 담배를 배웠다.

/고태성기자 tsgo@hk.co.kr

노무현 당선자에게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확정된 4월 이후의 8개월이 그의 전 정치 역정이 담긴 15년 세월보다도 더 길었다. 국민참여 형태로 치러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과정에서 천정부지로 치솟던 인기, 즉 노풍(盧風)이 꺼지면서 그는 당장 후보 지위가 유지될지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6·13 지방선거에서 참패한 뒤 상황은 더욱 어려워졌다. 지방선거에서 부산,경남,울산 등 3곳 중 1군데도 승리하지 못하면 재신임을 받겠다고 한 그의 약속 때문이었다. 8·8 재보선이 끝난 뒤 재경선을 수용하겠다는 카드로 시간을 벌었지만 재보선 마저 참패하자 희망이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월드컵 이후 기회를 보던 정몽준(鄭夢準) 의원이 대권 도전을 선언했고 이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민주당 일부 의원들이 정 의원과의 후보단일화를 주장하며 탈당하는 사태까지 생겼다. 9,10월께 정 의원을 포함한 3자 대결 구도에서 노 후보는 지지율 10%대로 3위로 추락, 아무도 그의 소생 가능성을 내놓고 말하지 못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노 당선자는 그러나 '반 이회창'세력 결집을 위해 11월 초 마지막 승부수를 던진다. 여론조사 결과에 의해 국민통합21 정몽준 대표와 후보단일화를 이루는 방안을 전격 수용한 것이다. 두 사람의 운명을 결정한 여론조사가 실시된 11월24일 심야. 노 당선자는 후보 단일화 협상에 참여했던 통합21측 인사에 의해 '단일 후보'로 선포됐다.

노 당선자는 단숨에 40%대의 지지율을 회복, 1위로 올라섰고 선거전에 들어간 뒤에도 줄곧 선두를 지키며 결승점에 도달했다.

/고태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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