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에게 판매·유통망은 인체의 혈관과 같은 존재다. 탄탄하게 짜여진 판매·유통망은 기업의 경쟁력을 떠받치는 중요한 축이다. 판매·유통망의 기저는 인적 네트워크다. 기업과 개인, 개인과 개인이 유기적인 관계를 맺으며 상호 교류하는 인적 네트워크가 견고할수록 기업의 미래는 밝다고 할 수 있다.모나미 물감, 왕자파스, 모나미 153 볼펜, 플러스펜 등 선뵈는 제품들이 인기를 끌수록 나는 판매·유통망 강화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하고 있었다. 아무리 좋은 제품이라도 소비자 손에 쥐어지지 않으면 폐기 처분될 수 밖에 없는 현실 앞에서 나는 한시도 긴장감을 늦출 수 없었다. 자체 판매·유통망이 없던 모나미의 사세가 커지자 도매상 관리 문제가 최대 현안으로 부상했다. 제품 공급량과 수금 문제를 놓고 줄다리기식으로 이뤄지던 주먹구구식 관리가 아니라 좀 더 체계적인 관리가 필요했다.
국내 기업들은 어차피 외국 기술을 전수받아 제품을 생산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5년, 10년이 지나면 국내 기업이 생산하는 문구제품의 질적 수준은 평준화할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모나미가 제품의 질만으로 승부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질적인 면에서 제품의 우열을 가릴 수 없다면 무엇보다 확실한 판매·유통망을 확보해야 했다. 가격은 그 다음 문제였다. 나는 국내 문구 제품들을 취급하는 전국의 도매상들을 확실한 '모나미맨'으로 잡아두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보고 즉시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모나미가 출범한 1968년, 나는 도매상들을 모나미의 판매사원으로 만들기 위한 '작전'에 돌입했다. 도매상들은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부부가 함께 일하는 경우가 많았다. 남편이 제품 포장 등 힘이 필요한 일이나 판매 업무 등 바깥 일을 처리할 때 아내는 창고 한켠에서 경리나 재고 파악 업무를 보며 남편 일을 도왔다. 체계적으로 공부를 하지 못한 탓에 대부분 도매상들은 기업 경영이나 유통 등 전문 분야에 대한 지식과 정보 없이 경험으로 영업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도매상으로서의 자존심을 심어주기로 마음 먹었다.
1차로 전국 도매상 80명을 영동 유스호스텔로 초청, 2박3일 일정으로 '최고경영자 세미나'를 개최했다. 행사 첫날 모나미 기업 현황과 경영 계획 발표가 있었고 도매상들과 현안에 관한 질의응답이 오갔다. "어음기한을 좀 늘려달라" "제품 공급량을 더 늘려달라"는 현실적인 요구도 쏟아졌다. 수용 가능한 요구는 즉석에서 수용하고, 들어주기 곤란한 사안에 대해서는 그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자 도매상들의 마음이 열리는 것 같았다. 이어 대학교수 등으로 구성된 강사진들로부터 자본주의 경쟁 체제에서의 시장의 역할과 유통의 중요성에 대한 강연 등을 듣고 나자 도매상들은 "내 직업에 큰 자부심을 갖게 됐다"며 만족스러워 했다. 최고경영자 세미나는 마지막날 밤 인기 가수와 코미디언을 초청, 노고를 위로하는 연회를 가졌다. 여기저기 자리를 옮겨가면서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도매상들의 애환을 경청했다.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등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도매상들은 무대 위에서 갈고 닦은 노래 실력을 발휘하거나 껄쭉한 입담을 늘어놓으며 좌중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켰다. 연회가 끝날 때쯤 여기저기서 "모나미 최고다" "1년에 한 두번 이런 자리를 마련해 달라"는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도매상들이 권하는 술을 다 받아마신 탓에 취하긴 했지만 나는 모나미가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최고경영자 세미나를 통해 도매상들은 조금씩 '모나미맨'이 돼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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