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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승 범 / "고독남·푼수, 모두가 내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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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승 범 / "고독남·푼수, 모두가 내 얼굴"

입력
2002.12.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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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행 제로' 시사회에서 영화를 본 류승범은 썩 만족한 것 같지는 않았다. 당초 시나리오에는 주인공 중필의 캐릭터가 좀 복잡 미묘했다. 주위에선 자꾸만 신화를 만들어주고, 심지어 그는 '짱'으로 불리지만 그는 자꾸 모든 것을 잃어가는 인물, 이를테면 만들어진 영웅의 고독을 느끼는 페이소스가 깃든 그런 인물이었다. 한마디로 채플린 같은 코미디를 하고 싶었던 류승범이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배우의 생각이고, 영화를 보고 나면 "류승범에 의한, 류승범의 영화"라는 말 밖에 생각나지 않는다.'츄리닝'(트레이닝복) 입은 모습이 그렇게 잘 어울릴 수 없고, 손바닥에 침을 찍어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는 사소한 몸짓, "교양을 처먹어도 시원찮을 아침 시간에 도시락을 까먹고 있냐"며 아이들을 야단치는 대사를 듣곤 폭소를 터뜨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영화 속 류승범과 현실의 류승범은 늘 다르다. 단정한 모범생. "심지어 너 가식이냐, 이렇게 묻는 사람도 있다. 아무튼 이중적인 성격인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남들보다 정중함이나 발랄함이 분위기에 따라 모드 전환이 잘 되는 편이다." 지킬박사와 하이드?

드라마 '고독'에서 다소 겉도는 것처럼 느껴졌던 류승범이 영화에 푹 녹아들었으니 그의 팬으로서는 꽤 만족할만하다. 그는 자신의 연기를 "칫솔이 화장실 칫솔 통 안에 들어 있는 듯, 있어야 할 곳에 놓인 것 같다"고 평했다.

영화 속 중필은 2년을 묵은 껄렁한 학생이지만 불량 여고생인 나영과 모범생 민희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인물. "사실 1, 2등 하는 여자애들하고는 5분도 얘기를 못하는 타입"이라는 게 류승범의 설명이다. 자기는 육두문자를 쓰는데, 여학생이 사자성어를 구사하면 대화가 불가능하다나. "둘 중 택하라면 나영이 스타일이 좋다"는 게 솔직한 심정.

중필과 그를 짝사랑하는 나영의 이미지는 드라마 '아름다운 시절'에서 보인 두 사람의 이미지와는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감독도 혹시 그렇게 보이지나 않을까 걱정한 게 사실이다. 그러나 또 한 번 그저 소비된다는 느낌이었다면 영화를 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중필이는 코미디라는 장치를 통과해 아련한 슬픔을 던져주는 존재"라고 극구 부연 설명한다.

중필이의 패션은 곧 류승범의 패션. "정장보다는 트레이닝 복이나 목이 너덜너덜한 티셔츠를 좋아한다"는 류승범은 영화에 나온 소품용 티셔츠를 집에서 입고 뒹굴어 영화에서 그의 티셔츠는 등살이 보일 정도로 후줄근하다. 도시락 먹는 아이들에게 던지는 '설교' 나 아이들 볼펜 빼앗는 장면 등은 리허설에도 없던 완벽한 애드립. "솔직히 난 IQ가 두 자리다. 머리가 그리 좋은 편이 아니다. 하지만 진짜 애드립은 영화 속 캐릭터에 푹 빠져 있으면 자연스럽게 나오는 고도의 연기다." 유난히 연기에 대한 고민이 많은 류승범다운 분석.

형인 류승완 감독과 류승범은 이제 완전한 스타가 됐다. "돈 버니까 당연히 좋지요. 먹고 싶은 것 맘대로 먹고, 갖고 싶은 것도 그렇고. 나이에 비해 빨리 성공했죠." '대가'를 묻자, 그가 뒤통수를 보여 준다. 뒷덜미 근처 머리가 500원짜리 동전만하게 빠졌다.

/박은주기자 jupe@hk.co.kr

● 품행제로

'품행제로'는 한마디로 80년대 생활사 박물관 같다. '교복 자율화 실시' 현수막, 성문종합 영어, 여학생들의 애용품 '웰라 폼', 나이키를 본 딴 나이스 운동화, 캔디와 하록 선장, 듀란듀란과 왬, 그리고 김승진의 '스잔'. 이런 추억의 소품에 대한 기억이 있다면 영화를 보는 내내 유쾌한 추억 여행을 떠날 수 있다.

2년을 꿇어 반 아이들로부터 형 소리를 듣는 중필(류승범). 아이들은 '중필이 혼자 유도부원을 박살냈다'는 등의 '신화'에 빠져들며, 날마다 그에게 '삥'을 뜯긴다. 그러나 이웃 학교 모범 여학생 민희(임은경)에게 한 눈에 반한 중필은 그녀를 따라 기타 교습소를 다니는 고군분투 끝에 좋아하는 사이가 된다. 그러나 중필을 좋아하는 여학교 '짱' 나영(공효진)의 질투가 본격화되고, 전학 온 상만(김광일)이 새로운 '짱'으로 부상하면서 중필은 위기에 빠진다.

아이들의 입으로 재현되는 '중필 신화'는 마치 명랑 만화를 영상으로 옮긴 듯하고, '한 놈 두시기 석 삼 너구리…'식의 구식 유머나 "네덜란드 소년이 댐이 샜다고 세 번 거짓말 하다 작살난 거 모르냐"는 엉뚱 개그, 구전으로만 전해지던 '면도칼 씹는 여자 깡패' 등 각종 80년대 기억이 유쾌하게 재현됐다.

하지만 중필의 아픔은 피상적으로 표현되고 중필의 엄마(금보라) 상만이 동생 영만(최우혁)등 전반부 의미있던 인물 얘기가 갑자기 사라지는 등 완성도 면에선 적잖은 문제가 노출된다. 하지만 실컷 웃다가 웃는 자신이 한심해지는 요즘 섹스 코미디에 비하면 '품행 제로'가 주는 웃음은 뒤끝이 깨끗하다. 조근식 감독 데뷔작. 27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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