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도 예쁜 정선군 신동읍의 태백선 예미(禮美)역에 내리면 잎 떨어진 침엽수사이로 멀찌감치 새하얀 고갯마루가 보인다. 반구형 케이크에 생크림을 덮은 듯한 탐스러운 모양새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설경이다.이름하여 새비재. 정선군 남쪽 질운산 자락에 있는 950여m의 고개다. 고개를 이룬 산의 형상이 마치 새가 날아가는 모습과 같다 해서 붙은 지명이다. 오래 전부터 화전민들이 정착해 터를 일구고 살아 왔으나 1970년대 초 정비사업으로 지금은 고랭지 채소를 재배하는 소수만이 살고 있다.
새비재로 올라가는 길은 세 가지다. 신동읍 길운리 '달동네'라 불리는 촌락을 거쳐 용운사가 있는 절골로 올라가는 길, 단곡계곡과 설령을 거쳐 농로를 따라 올라가는 길, '안경다리'라불리는 조그만 교각으로부터 올라가는 솔밭길이 그것이다.
4㎞ 남짓한 솔밭길이 가장 예쁘다. 완만한 경사로 산을 휘감으며 신동읍의 전경을 감상할 수 있다. 붉은 올괘불나무열매, 찔레 열매 등도 간간히 보인다.
사각사각, 눈 밟는 기분이 괜찮다. 소나무 그늘에 겨울 내내 좀처럼 눈이 녹는 일이 없다. 눈쌓인 길가쪽으로 소나무가 소담스럽게 가지를 내밀고 있어 마치 터널같다. 가지에 제법 두툼하게 쌓였던 눈이 바람에 하얗게 날린다. 사이사이 자작나무 숲이 은빛으로 빛난다.
길 중턱에서 바라보는 신동읍의 풍경은 옛날 영화의 한 장면처럼 아련하다. 두위봉 산줄기 중턱만치 태백선이 긴 기적을 울리며 지나가고, 색색으로 지붕을 얹은 광산촌 사택이 동화속 마을처럼 자리잡고 있다. '개도 만원짜리를 물고 다니던' 석탄촌의 영화는 간데 없지만 눈덮인 산골마을은 고적하고 아늑한 풍취를 뿜어낸다.
한 시간 반 남짓한 산책을 거쳐 도착한 새비재는 온통 은빛 광장이다. 60만평이 넘는 고랭지 채소밭이 아니면 볼 수 없는 광경이다. 내년 무농사를 위해 포크레인 작업을 한 몇 줄의 흔적이 있을 뿐, 눈 쌓인 모양새가 마치 스키장처럼 곱다.
이곳은 눈이 내리기 전부터 수많은 커플이 다녀간 명소다. 영화 '엽기적인 그녀'의 두 주인공이 2년 후 만남을 기약하며 타임캡슐을 묻은 소나무 때문이다. 동네 사람들은 장난삼아 '엽기 소나무'라 부른다. 그 덕에 인근 어딜 파도 타임캡슐이 나올 정도다. 100여m 간격으로 조그만 소나무가 드문드문 있기 때문에 영화의 주인공을 찾기는 의외로 쉽지 않다. 고갯마루 꼭대기 삼판로의 '백운농장' 입간판을 따라 가다 새비재의 탁 트인 부분에서 2시 방향을 보면 조그맣게 나무가 보인다.
새비재 뒷편에 또하나 그림엽서 같은 풍경이 있다. 새하얀 눈밭 틈새로 군데군데 자라난 나무와, 기껏해야 달구지가 한두 번 지나갔을 법한 조그만 오솔길이 나 있다. 채소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10여가구가 소담하게 마을을 이룬, 이름마저도 고적한 독가촌(獨家村)이다. 농로를 따라 한참을 가면 강원랜드로 가는 길이 나온다. 봄에 철쭉으로 유명한 두위봉의 7,8부 능선 무렵부터 시작해 강원랜드 정문으로 가는 이 길은 본래 석탄을 나르던 운탄도로였다. 은빛으로 물든 정선 신동읍의 길에는 삶의 질곡과 산업의 흥망성쇠, 어느 시대에나 질척하게 살아있는 물욕이 묻어있는 듯했다.
/정선=글·사진 양은경기자
■둘러볼만한 곳
강원 정선군 신동읍은 인근 관광지를 지나며 한 번씩 들를 뿐, 굳이 관광을 위해 찾는 곳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색적인 설경이 입소문을 타기 시작한 데다 내년부터 생태관광을 위한 개발사업이 이루어질 예정이어서 관광 잠재력이 높은 곳이다.
강릉지역은 영동고속도로 장평 IC를, 서울 및 영·호남지역에선 중앙고속도로 서제천 IC를 이용한다. 서제천 IC 에서 38번 국도를 타고 영월을 거쳐 신동읍에 오는 데 서울 근교에서는 3시간 가량 걸린다. 청량리역에서 예미역 가는 기차가 하루 다섯 차례 있고, 영월서 예미역을 거쳐 새비재 초입까지 오는 버스도 1시간마다 1대씩 있다.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예미역에서 421번 지방도를 타고 함백쪽으로 직진하다 시장거리서 우회전하면 새비재 초입에 닿는다.
정선은 워낙 넓어 군내에도 들러볼 관광지가 많다. 우선 정선을 상징하는 전설의 땅 아우라지가 있다. 38번 국도를 타고 가다 남면서 429번 지방도를 바꿔 타면 40분∼1시간 정도 걸린다. 수해로 다소 황량했던 아우라지가 눈이 내리면서 예전의 명성을 다시 찾았다. 물길과 흰 강변, 섶다리가 어우러져 포근하고 정겹다. 한 칸짜리 꼬마열차도 정선의 참맛을 느낄 수 있는 명물이다. 최근 철도청에서 카페형 '아리랑열차'로 증산∼정선구간을 운행하고 있다.
승우여행사(02-720-8311)가 무박으로 새비재와 정동진 일출, 오대산 월정사를 돌아보는 상품을 판매중이다. 개별여행의 경우 현지 여행사인 아라리투어(033-378-2111, www.araritaema.com)에서 새비재 교통, 숙박과 더불어 농가숙박과 어로체험, 시골장터와 박물관구경 등 인접관광에 대해 자세한 안내를 받을 수 있다.
/양은경기자
■토속음식
강원도에서도 오지로 꼽히는 정선이니 만큼 토속적인 먹거리가 쏠쏠하다. 우선 영월 들어가는 입구의 문곡삼거리에 있는 '삼거리휴게소'를 꼽을 수 있다. 38번 국도를 타고 정선으로 가는 자가운전자라면 한번쯤 들러볼 만한 곳이다. 인스턴트 일색인 휴게소 음식에 대한 편견을 깨는 집이다. 직접 만든 청국장이 일품이다. 특유의 쾌쾌한 냄새가 나지 않으면서도 메주콩이 알알이 들어있어 옛날 시골 맛이 살아 있다. 2인분을 시키면 서너 그릇은 족히 비벼먹을 만큼 양도 넉넉하다. 1인분 4,000원 (033)374-1992.
새비재가 있는 신동읍에는 '곤드레나물밥'이 맛있다. 곤드레는 취나물처럼 생긴 산나물로 봄철 한창 나물이 나는 시기에 많이 뜯어 놓았다가 1년 내내 쓴다. 너무 맛있어 먹고나면 곤드레만드레 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나물을 넣어 콩나물밥처럼 짓는데, 쌉싸름하면서 고소한 나물밥에 양념장을 쳐 비벼먹으면 한 대접 비우기는 순식간이다. 예미 1리의 '본가숯불갈비'는 곤드레밥이 특히 맛있는 집. 1인분 5,000원. (033)378-3636.
정선읍 봉양리 정선등기소 앞에 '이모네 식당'은 감자옹심이로 유명하다. 생감자를 갈아 짜내 생기는 앙금과 묵어리(짜낸 후 남은 섬유질)를 적당히 섞어 만든 수제비가 텁텁하면서 고소하고 쫄깃하다. 본래 옹심이는 동그란 새알심 모양으로 만들지만 이곳서는 빨리 익도록 수제비 모양으로 빚어 뭉툭한 메밀콧등치기와 함께 끓여 내온다. 곁들여 나오는 고추다대기, 갓김치, 배추김치 등과 곁들여 먹는데 그득한 한 그릇을 다 비우더라도 소화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한그릇 4,000원. (033)562-9711.
/양은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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