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은 제16대 대통령을 선출하는 날이다. 국민의 총의로 선출된 대통령은 앞으로 5년 간 국가를 이끌어가게 된다. 대통령 선거를 목전에 둔 우리는 다시한번 대통령의 자질을 생각해야 한다.이번 대통령은 21세기 최초의 대통령이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와 21세기의 환경은 엄청나게 다르다. 20세기가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동서와 남북이 대립하는 극단의 시대였다면, 21세기는 전 지구적으로 보이지 않는 전쟁을 하는 다극화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말부터 등장한 세계화는 속도를 더하여 전 지구촌을 휩쓸 것이며, 국가간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것임은 불 보듯이 훤하다.
한반도 주변의 국제정세는 더욱 급변하고 있다. 평화헌법에 따라 비무장을 표방한 일본은 미국의 이라크 전·후방 지원을 위해 이지스함을 인도양으로 파견했다. 일본의 재무장, 군사강국은 우려가 아니라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중국은 거대한 시장을 바탕으로 경제강국으로 급부상하고 있으며, 조만간 경제적으로도 우리를 위협하게 될 것이다. 게다가 미국은 세계의 경찰을 자처하면서 우리의 모든 것에 간섭하려 들지도 모른다. 이러한 초경쟁과 다중세력의 시대에 새로운 대통령은 어떤 자질과 능력을 겸비해야 하는가?
600여년 전 조선을 건국할 때로 되돌아본다. 대륙에서는 몽골족이 세운 원(元)이 쇠망하고 명(明)이 흥기하였고, 바다 건너 일본에서는 중앙통제력이 이완되어 왜구가 고려와 중국으로 노략질을 하던 국제적 무질서와 변화의 시기이었다. 국내적으로는 원의 침략과 왜구의 발호, 그리고 부원(附元)세력 등 토호의 발호로 백성이 도탄에 빠져 있었고, 사회의 질서와 윤리는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이 때 조선을 건국한 신흥사대부(新興士大夫)들은 안으로는 사회의 기강을 확립하고 밖으로는 변화하는 국제정세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면서 국가발전의 기틀을 확립하였다. 신흥사대부들은 단순히 지배층만이 교체된 국가의 재건을 기도하지 않았다. 그들은 거대한 국가경영의 전망과 이상을 가지고 조선 사회를 만들어갔다. 이상에 따라 새롭게 국가와 사회의 체제를 개혁하려고 하였다.
그들이 구상한 이상사회는 사회구성원이 각자의 지위에서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는 안정적인 국가였다. 오늘날 중산층인 사림(士林)을 중심으로 그들이 국왕을 보좌하여 국가를 통치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도덕적 우위로 일반백성을 통치에 포섭시키려 하였다. 그들은 이러한 안정적인 사회체제를 지속시키기 위해 평생의례인 관혼상제(冠婚喪祭)를 보급하여 국민들의 신앙체계, 나아가 사고방식까지 바꾸려고 노력하였다. 그 결과 15, 16세기 조선사회는 국민통합을 이룩하고 안정을 구가하였다. 16세기 말 일본과의 전쟁에서 초기에는 관군이 패하여 선조가 의주까지 피난하였지만, 지방에서 의병이 봉기하면서 승리할 수 있었다. 전쟁 승리의 원동력은 의병이었으며 의병은 초기 신흥사대부들이 구상한 국가와 사회체제가 일반 백성에게까지 수용되어 국민통합이 완성되었음을 의미한다. 초기의 거대한 구상이 사회에 뿌리를 내렸기 때문에 사림을 중심으로 두 차례의 전란을 겪고서도 이후 찬란한 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다.
다시 눈을 현실로 돌린다. 600여년 전 국민통합을 이루고 국가경영의 이상과 전망을 제시하는 대통령 후보는 찾을 수 없다. 무한경쟁과 다극화의 험난한 파도를 헤쳐갈 구체적이고 실천방안이 갖추어진 국가의 이념과 전망을 제시하기는 커녕 아직도 옛 모습을 못 벗어 던지고 경쟁자에게 생채기를 입히기에 여념이 없다. 서로 자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못난이 시합'을 하고 있다. 나는 기대한다. 장차 21세기에 국민을 하나로 아우르고 국가를 이끌어갈 이상과 전망을 제시하고 이를 실천할 수 있는 후보를 선택하기를. 그리고 그가 이것을 제대로 실천하는지를 감시하기를. 서로를 헐뜯는 선거전이 다시는 없기를.
정 긍 식 서울대 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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