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마다 그 기업을 상징하거나 대표하는 로고나 제품이 있기 마련이다. 로고는 소비자들의 두뇌 깊숙한 곳에 기업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요즘 기업들은 저마다 특색있는 로고를 창안하는데 막대한 자금을 쏟아붓는다. 또 잘 만든 제품, 잘 지은 제품명 하나가 기업 이미지를 좌우한 예도 많다. 그런 제품은 해당 기업에 대한 소비자들의 신뢰를 높여 다른 제품의 매출까지 덩달아 오르는 동반효과를 낳기도 한다.모나미 물감, 모나미 153 볼펜이 인기를 끌 때도 나는 기업 이미지 문제에 관한 한 문외한이었다. '소비자들에게 기업명이나 제품명은 중요하지 않다, 좋은 물건을 만들어 팔면 그만이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 그런 내게 기업 이미지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준 사람이 바로 우치다요코(內田洋行)의 소키쿠(雙菊) 과장이었다. 그는 전에 이야기한대로 모나미 153 볼펜 탄생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1967년 나는 일본 출장을 간 김에 우치다요코에 들렀다. 1년에 한 두번 가는 일본 출장이었지만 그 때마다 나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우치다요코를 꼭 방문했다. 볼펜, 크레파스 제조기술을 전수받는데 그 회사가 도움을 준 마당에 모른 척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회사 임원들과 인사를 나눈 뒤 나는 오랜만에 만난 소키쿠 과장과 함께 긴자(銀座) 거리로 나가 술잔을 부딪쳤다. 도쿄의 최고 중심가인 긴자 거리는 고도 성장기를 맞은 일본 경제 상황을 반영하듯 흥청거렸다.
술이 몇순배 도는 동안 내가 모나미 153 볼펜의 생산·판매가 아주 성공적이라고 전하자 소키쿠 과장은 마치 제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크게 기뻐했다. 그러나 자리가 파할 무렵 그가 불쑥 내뱉은 한 마디는 내겐 큰 충격이었다. "한국의 소비자들은 모나미 153 볼펜을 어느 회사가 만드는지 알고 있습니까."
나는 한번도 그런 문제를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곰곰이 생각하니 모나미 153 볼펜을 사서 쓰는 소비자들 가운데 광신화학이 모나미 153 볼펜 제조업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열명중 한명도 안될 것 같았다. 소키쿠 과장이 말을 이었다.
"소비자들은 모나미 153 볼펜을 찾는데 제조원은 광신화학입니다. 좀 어색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기왕 모나미 물감도 만들고 있으니 이번 기회에 회사 이름을 '모나미'로 바꾸는 게 어떻겠습니까."
나는 무릎을 쳤다. 귀국하자마자 나는 간부회의를 소집했다. 긴 설명이 필요치 않았다. 광신화학이라는 이름을 떼내고 전 국민에게 널리 알려진 모나미로 사명을 바꾸자는 제안에 반대란 있을 수 없었다. 만장일치로 회사명 변경이 결정됐다. 지병 치료 때문에 회사를 자주 나오지 못하고 있던 이용섭 사장도 회사명 변경을 흔쾌히 허락했다.
1967년 12월28일 광신화학은 모나미화학공업주식회사로 사명을 바꾸고 새 출발을 하게 됐다. 1968년은 모나미가 다시 한번 도약할 수 있는 계기를 맞이한 해였다. 그해 7월 모나미 153 볼펜이 정부로부터 한국공업규격(KS) 마크 표시 허가를 획득한 것이다. 지금이야 KS 마크의 의미가 예전에 비해 반감되긴 했지만 당시 모나미 153 볼펜의 KS 마크 획득은 큰 경사였다. KS 마크는 비록 단순한 공업규격일 뿐이지만 KS 마크 획득은 정부가 모나미 153 볼펜의 품질을 공식 인정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이를 계기로 모나미는 정부에 볼펜을 정식으로 납품할 수 있게 됐다. 당시 국내에서는 모나미 외에 볼펜 생산업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때문에 모나미의 KS 마크 획득은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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