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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 국토기행](10) 음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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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 국토기행](10) 음성

입력
2002.12.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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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지명 중에서 '그늘 음(陰)' 자를 쓴 곳은 충북 음성(陰城)군 밖에 없다. 하필 음 자인가. 양(陽) 자를 쓴 지명이야 얼른 떠오르는 것만 해도 한둘이 아니지만, 그냥 풀어서 '그늘의 성'이란 땅 이름이 유독 호기심을 부추긴다. 아주 먼 내륙의 오지처럼 느껴지는, 왠지 사연도 많을 것 같은 이름이다. 민물낚시 좋아하는 이들에게나 잘 알려진 원남지, 통동지 등 월척붕어터를 빼면 딱히 유명한 명소나 관광지도 없는 것 같다.그러나 음성은 멀지 않았다. 동서울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중부고속도로를 달려 1시간 30분 남짓이면 그곳에 도착한다. 음성의 또 다른 옛 이름 중에는 설성(雪城)이 있다. 눈이 많이 내리는 고장이라 그런 이름도 생겼다. 올 겨울 들어 처음 눈 다운 눈이 내려 아직 잔설이 희끗희끗한 산자락과 들판에 잠깐 눈길이 갔나 싶었는데 어느새 음성이다.

1987년 중부고속도로가 개통되고 인터체인지가 생기면서 음성은 급격히 변모했다. 서울에서 한 시간대, 차령산맥과 노령산맥의 품에 안겨 한강과 금강의 분수령을 이루면서 사철 물 걱정 없는 이 내륙 분지의 알짜배기 땅을 기업체들이 놓칠 리 없었다. 고속도로 개통 직후인 88년에 206개에 불과하던 음성 지역 입주 기업체 수는 2002년 현재 무려 1,200여 개로 늘어났다. 공장들이 들어서면서 90년 7만 4,717명이던 음성 인구는 매년 1,000∼2,000명씩 늘어나 2002년 현재 8만 6,682명이다. 음 자를 지명으로 쓴 것도 전국에서 유일하지만, 전국의 군 단위 자치단체 중에서 인구가 늘고 있는 곳도 음성이 유일하다.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음성읍으로 향하는 길 좌우에 삼성농공단지, 대소공업단지, 금왕농공단지, 금왕공업단지들이 하나하나 줄지어 나타난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옛 말 그대로 음성의 최근 10여 년은 상전벽해였다.

공장이 생겨 인구가 늘어났다지만 거의 외지인들이다. "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 한 30리, 10㎞ 이내 지역인 금왕읍, 대소면이야 많이 달라졌지만 옛 고장인 음성읍 일대는 별로 변한 게 없습니다." 안용섭(53) 음성군 문화공보과장의 말이다. 그의 말처럼 신흥공업지역과 전통적 농촌지역의 균형 문제랄까, 차이는 벌써 겉보기에서 확 느껴지기도 한다. 신흥 지역에는 공장이 들어설 땅을 팔아서 벼락부자가 된 이들도 많았다. 새로 들어서는 집의 형태는 모조리 아파트이고, 대소면의 초등학교는 매년 학급 수를 6개씩 늘려야 했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논과 수박·인삼·고추밭뿐이었던 금왕읍과 대소면은 웬만한 수도권 신도시 저리가랄 정도로 번쩍거린다.

하지만 군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37번 국도를 타고 음성읍 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이 지역의 본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사철 물 걱정 없는 고장이라는 말을 실감시키듯 저수지 3개가 나란히 연결된 3형제 저수지의 모습이 눈길을 끈다. 잠시 뜸하지만 봄에서 가을까지 이 곳을 찾던 낚시인들의 모습은 저수지 수면이 얼어붙고 빙어가 낚일 무렵이 되면 다시 나타날 것이다. 조선시대 문인 서거정(徐居正)은 음성을 읊은 '백구겸수정(白鷗兼水靜)'이란 시에서 '계곡물 맑아 옥이 한 둘레로다'라 했다는데, 이곳에는 가섭산, 수정산 등의 계곡에서 흘러나온 물을 담아논 크고 작은 저수지가 70여 개나 된다. 그 주위를 따라 음성의 고추밭이 펼쳐진다.

고추는 음성의 가장 큰 자랑거리다. 68년 음성 농민들은 전국에서 처음으로 고추를 노지 재배가 아니라 비닐을 씌워 키우기 시작했다. 지금 보통 고추 값이 한 근에 4,000∼6,000원인데 당시 음성 고추 한 근을 4,000원에 팔았다. 그 돈으로 자식들 공부시키고 외지로 내보냈다. 각지의 농민들이 재배법을 배우려고 몰려들었다. 전국 지자체 중에서 처음으로 95년 서울지하철 전동차 내에 배너 광고를 시작한 것도 음성군이다.

"한 해에 3만∼4만 명이 견학을 옵니다." 99년 김대중 정부의 제2건국위원회가 선정한 '신지식인' 1호로 뽑힌 고추재배 농민 이종민(56)씨는 고추연구소를 세웠다. 20여년 간 재배 기술을 연구하며 품질을 개량하고 생산량도 5배 이상 늘렸다. 음성에는 이씨의 표현처럼 '선두 농민'들이 많다. 고추뿐 아니라 99년 서울 가락시장에서 1통에 1만 8,000원이나 받고 판 기록이 아직도 깨지지 않은 '맹동·대소 수박'을 비롯해 '감곡 복숭아'와 인삼, 쌀 등의 품질은 전국에서 으뜸이라고 한다. 유난히 특산물이 많은 고장이 바로 음성이기도 하다.

"음성을 소개할 게 뭐 있나요. 사람들 많이 불러들일 수 있는 관광자원도 없고…. 음성 사람들이야 뭐 그냥 그렇지요." 음성읍 출신 주민 김용관(37)씨의 말에서 좀처럼 속을 잘 드러내지 않는 음성 사람들의 기질이 느껴진다. 충청 지역 사람들이 그렇다지만 이들의 속 드러내지 않음은 오히려 여유의 다른 표현처럼 보인다. 음성 출신 사람들은 누굴까. 여말선초의 문신 권 근(權 近), 함흥차사 박 순(朴 淳) 등이 역사 속의 인물이다. 한국 농민문학의 선구자 격인 이무영(李無影·1908∼1960)이 이곳에서 태어나 생가 터가 보존돼있고 매년 4월이면 무영제가 열리는데 사실 그의 농촌문학은 음성에 기반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어릴 적 음성을 떠났다. 자신보다 못한 걸인들을 돌보는 생활로 오웅진(吳雄鎭·58) 신부로 하여금 76년 꽃동네 설립의 계기를 제공한 걸인 최귀동이 음성 사람이다. 음성 꽃동네에는 지금 2,300여 명이 수용돼 보호받고 있다. 전국품바축제도 음성에서 열린다.

"고추야 시간이 지나면 붉어지는 거지요."

음성 사람들은 이런 말을 했다. 세상사의 섭리를,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고장의 농산물에 빗대어 참으로 단순하고도 아름답게 표현한다. 변하고 있어도 음성은 이렇게 소박한 고장이다. 서거정은 '백구겸수정'에서 그러한 음성의 특징을 음양의 조화에 비유했다. '음성은 바로 오랜 고을인데/ 양지골에는 아침 햇살이 깨끗하다/ 수풀못 깊숙한 데 앉아 있으니/ 푸른 물방울이 옷을 적시네.' 맵기도 하지만 단 맛이 나는 음성고추 같은 땅이고 사람들이다.

/하종오기자 joha@hk.co.kr

사진 김재현기자 jaehyunk@hk.co.kr

● 박종대 음성향토사연구회장

"음성의 음(陰)은 우주 만물을 창조한 음, 어머니 품 속 같다는 의미의 음입니다."

박종대(56·사진) 음성향토사연구회장은 음성의 지역사에 관한 책만 10권을 냈다. 98년 '음성 유래'를 첫 출간한 이후 올해 3월 '음성 택리지'까지 몇 년 사이 숨가쁘게 고향의 지명과 역사와 사람에 관한 책을 쏟아냈다. 다 자비 출판이고, 그 사이 '고향 서사시' 등 역시 음성 이야기를 담은 시집 두 권도 냈다.

"모두 50권을 낼 계획입니다." 음성군 소이면 충도리에서 태어나 산업통신사에 근무하다 해직된 언론인 출신인 그는 87년 음성향토사연구회를 만들었다. 92년 8월에는 음성군 최초의 지역신문이었던 주간 '음성민보'를 창간했다. "당시만 해도 음성의 역사에 관한 자료가 없다시피 했습니다. 없는 것이 아니고 정리되지 않았던 거지요. 문헌을 뒤지고, 인근 충주 지역사에 편입된 내용을 밝혀내기 시작한 것이 향토사 연구의 계기였습니다." 읍, 면은 물론 이 단위 자연부락 지명의 유래까지 그는 하나하나 파고들었다.

"고구려 장수왕 때 음성의 지명은 잉홀(仍忽)이었습니다. 잉은 물(水), 홀은 곡(谷) 또는 성(城)의 이두식 표기로 '물골'을 뜻합니다. 물이 떨어지지 않아 사계절 살기 좋은 고을이라는 뜻이지요. 물이 많아 '음' 자를 쓰게 됐다는 것이 음성 지명의 유래라고 일반적으로 보지만 나는 생각이 다릅니다."

박씨는 음양설로 음성 지명의 유래를 풀어낸다. 음성의 지형 자체가 만물의 모태인 어머니 품 속 같은 형상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무극(無極)이라는 지명이 남아있는 것이 그것을 뒷받침한다고 한다. 만물의 기(氣)가 음에서 무극으로, 다시 양(陽) 정(精)을 지나 음으로 돌아간다고 보는 음양설에 따라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명이다.

"어쨌든 음성 사람들은 온순하고 다른 사람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넉넉함을 갖고 있습니다. 타 지역 사람들이 와도 이른바 '객지 태우지' 않지요." 박씨는 향토사 연구의 결실로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한국사학회 회원으로도 일하고 있다.

/하종오기자

● 충북 음성군 현황 (2002년 11월 30일 현재)

위치 동 충북 충주시, 서 경기 안성시, 남 충북 괴산군, 북 경

기 이천시

인구 29,585세대 86,682명(남 44,579명 여42,103명)

면적 520.9㎢

행정구역 2읍 7면

산업 농업 8,731농가 26,935명, 제조업 1,209개 18,203명, 개인사업체 2,768개 6,472명

예산 2,066억 2,868만 원

문화재 5층 모전석탑, 김주태·서정우 가옥, 감곡성당, 권 근 묘소, 박 순 사당, 수정산성 등

특산물 고추, 수박, 복숭아, 배, 인삼 등

관광자원 설성문화제, 3형제 저수지, 고추연구소, 미타사, 감우재(무극) 전적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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