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건영 가톨릭대 국제학부 교수북한 외무성 대변인의 담화문은 대북 중유 공급이 중단된 데 대응한 입장 표명이 아닌가 싶다. 즉 이번 사태는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한 1994년의 경우처럼 군사적 위기 측면보다는 전력 부족 등 북한의 경제적 곤란에 따른 생존권 차원의 성격이 강하다는 것이다. 미국의 인공위성 감시 사실을 알고도 굳이 미사일을 수출한 것도 그만큼 경제 사정이 절박했기 때문이다. 미국 역시 이라크와 전쟁을 추진중이기 때문에 현재 북한과의 긴장을 야기할 조건이 아니라고 본다. 따라서 94년 수준의 핵 위기가 재연될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낮다.
특히 최근 북미간 물밑접촉이 있었다는 뉴욕발 보도 등 정황을 종합해볼 때 폭발력은 크지 않을 것 같다. 이번 사태는 결국 북한이 농축우라늄 보유를 시인한 것으로 야기된 것이다. 하지만 농축 우라늄 실체가 미미한 만큼 이 부분의 해결이 선행되면 중유는 공급될 것이다. 농축우라늄 문제를 푸는 과정에서 북한과 미국이 서로 체면을 살려주면서 한 발씩 양보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북한은 생존 문제, 미국은 이라크라는 더 큰 문제가 각각 걸려 있는 만큼 이번 사태를 계기로 정면충돌할 가능성은 적다고 본다.
■김성한 외교안보연구원 교수
북한이 동결된 핵 시설을 재가동하겠다고 밝힌 배경에는 북한 미사일 선박 억류 사건이 있는 듯하다. 체면을 중시하는 북한으로서는 상처 난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역공세 카드를 꺼냈을 수 있다. 또 다른 배경은 미국의 대북 중유공급 중단에 따른 에너지난이라는 현실적 문제이다. 미국이 매년 지원하는 중유 50만 톤은 북한 에너지 수급의 15%를 차지한다. 당장 12월분부터 지원이 끊긴 북한으로서는 언제까지나 기다릴 수 없다고 판단, 미측의 태도 변화를 촉구하는 강수를 둔 것이다.
하지만 북한이 대미 대화 재개 여지를 강하게 남기고 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담화는 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 원칙을 강조했고, 향후 북한의 후속조치는 전적으로 미국에 달려 있다고 밝혔다. 대화 메시지도 동시에 담긴 것이다. 북한도 1994년과 같은 벼랑끝 전술이 미국에 잘 먹혀들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다.
북한에 대해 미국은 우선 대북경제 제재 조치를 강화하는 쪽으로 대응의 방향을 잡을 것으로 보인다. 경우에 따라서는 북한 핵 문제를 유엔으로 가져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북한이 봉인된 폐연료봉을 재처리하는 등의 위험한 상황이 발생하기 전 미국이 대북 선제 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우려는 성급하다. 이 문제는 결국 한미 간의 긴밀한 공조 속에서 해결돼야 할 사안이다.
■조명철 대외경제정책硏 연구위원
미국에 비해 시간이 부족하다는 점이 북한의 이번 조치를 부른 것 같다. 경제적으로 급하고 겨울이 닥치면서 주민 생활 등 내부 문제도 처리해야만 한다. 여기에 미국의 전방위 압박에 대해 '우리도 선택권이 있다'라는 식의 다소 신경질적인 반응도 보태진 것으로 보인다. 또한 대 이라크전 준비에 바쁜 미국을 밀어붙이기에는 지금이 적기라는 분석이 작용했을 것이다.
미국은 당분간, 적어도 한국 대선까지는 구체적인 대응을 미룬 채 지켜볼 가능성이 크다. 차기 정권의 성격에 따라 미국의 선택 폭도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북미 관계에서 서로의 신경을 자극하는 방법은 결코 사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미국과 북한 양측 모두에게 경고 메시지를 보내야 한다. 북에는 "이런 위협이 계속되면 남북 관계가 끝날 수도 있다"는 식으로 경고하는 한편, 미국에는 "계속 북한을 압박하기만 한다면 미국에 대한 불신이 커지고 북미 관계에 대한 한국의 협조도 어려울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양측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는 게 중요하다.
지금 북한의 내부 에너지는 1994년과 다르다는 점에서 그때보다 위험하다. 북한이 더 과격하게 나갈 수 있다. 북한은 특히 제네바 합의에 대해 미국에게 배신당했다는 생각이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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