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94년 한반도를 휘몰아친 북한 핵 위기는 미국과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특별사찰 실랑이에서 비롯됐다. 북한이 '체제 압살'이라며 '벼랑끝 전술(brinkmanship)'으로 맞서자 미국은 전쟁계획을 실행단계까지 끌어올리며 압박했다.위기는 93년 2월25일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미신고 영변 핵 시설 특별사찰 요구에 대해 북한이 3월12일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로 맞서면서 시작됐다. 북한은 그러나 탈퇴 전 3개월의 유예기간이 필요하다는 조항을 인정해 즉각 탈퇴를 표명하지는 않았다.
북한은 유예기간을 활용해 5월 초 유엔 대표부를 통해 미국에 회담 개최를 먼저 제의했다. 당시 강석주(姜錫柱) 외교부 제1부부장은 7월14일 제네바에서 열린 2차 북미회담에서 경수로 제공시 원자로 대체 의사를 내비쳤다. 11월11일에는 북한 실체 인정과 핵사찰, 남북·북미대화 재개를 일괄 협상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이 제안은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이 미국측에 거부를 촉구해 무산됐다.
북한은 다시 강경해졌고 IAEA는 94년 3월15일 "북한의 핵 물질이 핵무기로 전용되지 않았음을 검증할 수 없다"는 최종 선언과 함께 사찰단 철수를 명령했다. 미국은 유엔제재와 무력제재 방안을 검토했다. 미국은 대북 군사공격을 강행키로 결정했으나 김영삼 정부는 강력한 반대의사를 전달했다.
위기는 극적으로 해소됐다. 김일성(金日成) 주석은 6월15일 방북한 지미 카터 전 미 대통령에게 '북-미 협상 이전 핵 임시 동결'을 약속했다. 북미 양국은 8월5일 3차 협상을 시작, 10월21일 제네바 기본합의에 서명했다.
/이동준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