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고3 시절을 마감 중인 큰 애랑 모처럼 백화점 나들이에 나섰다. 골덴바지가 하나 필요하다나. 동네에 새로 생긴 대형백화점 2층에서 마음에 꼭드는 바지를 찾아냈다. 가격표를 보니 무려 13만8,000원.내 눈엔 인터넷 쇼핑몰에서 파는 두벌에 3만9,800원 하는 바지랑 다를 게하나도 없는데…. 골덴 바지 하나가 왜 이렇게 비싸냐고 판매원에게 한마디 했더니 바지가 다 똑같으냐며 딸아이와 함께 입을 모아 이렇게 외쳐댄다. “다른 데도 다 이 정도는 해요!” 졸지에 돈만 알고, 패션은 P자도모르는 아줌마가 되어버렸다.
#2.큰 애가 친구들이랑 토요일 저녁의 광화문 촛불시위에 가겠다고 나선다. 친한 친구 부모님이 “그런 곳에도 안 가는 애는 내 딸이 아니다’”며 강력 권유하셨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는 광화문의 미국 대사관, 극렬 시위, 전경, 교통 마비, 최루탄 같은 단어들이 획 지나갔다. “좀 위험할 것 같애, 엄마 생각에는. 셋이 그냥 함께 모여 효순이 미선이, 마음속으로 추모하면 안 되겠니?” 결국 아이들의 발목을 잡고 말았다.
그리고 그날 뉴스에서 본 광경들. 아기들 유모차에 태운 채 촛불 들고 걷는 젊은 부부, 가여운 두 친구의 넋을 기리는 맑은 눈망울의 여학생들, 그평화롭고도 강렬한 추모의 물결…. 나의 졸렬한 사태 판단이 날 슬프게 한다. 효순아, 미선아 미안해….
#3.클리프 리차드가 온단다. 그가 누구인가. 이대 강당에서의 공연때 여학생들이 팬티를 벗어 던져 한국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았던 그 전설적인가수 아닌가. 그때 난 중학교 1학년이었다. 두살 위 언니가 하도 난리를피워 티켓도 확보하지 못한 채 엄마랑 셋이서 신촌행 버스를 탔다.
옆집의 기자 아저씨(그 공연이 한국일보 주최였다)가 어떻게든 입장시켜주겠다고 한 약속을 믿고 무작정 이대 강당 앞으로 갔다.
그런데 웬걸. 입구에서 건장한 장정들이 기다란 대막대기를 휘두르며 몰려드는 인파를 막고 있었고 기자 아저씨와의 도킹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귀가길 내내 통곡을 금치 못했던 언니, 그런 언니를 보며 무지막지하게 화를 내던 엄마. 그 웃지 못할 삽화가 벌써 34년 전이라니, 헉.
#4.둘째 아이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내일의 스케줄을 묻는다. 점심 약속도 있고, 들를 데도 있다고 대답하는데 표정이 영 심상치 않다. 캐물어 보니 인터넷 운세 사이트에서 ‘내일 모친 사망’이라는 점괘가 나왔다는 것이다. 그러니 웬만하면 집에 있으면 안 되겠느냐고 거의 우는 얼굴이다.
하도 기가 막혀 어떤 점쟁이도 죽음을 예언할 수는 없다, 엄마 내일 꼭살아 돌아오마, 온갖 소리로 아이를 설득했지만 뒷맛은 영 씁쓸하다. 초등학생이 재미로 보는 인터넷 운세에 그런 황당한 점괘를 올리는 사이트,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이덕규(자유기고가) boringmo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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