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요즘 사는 곳은 미국인데 얼마 전 캐나다를 다녀왔다. 일정을 마치고 돌아올 때 그곳으로 나를 초대했던 분이 마지막 인사를 나누면서 이런 말을 한다. 어디로 보나 평범한 가정 주부인데 어떻게 그런 성깔깨나 있는 소설을 쓰지요?하긴 내 소설을 읽은 뒤 나를 만나본 사람들은 곧잘 '생각보다 친근감이 가는 분이시네요'라고 말하곤 한다. 평범하다는 뜻이다. 작가라고 하면 뭔가 지적이라거나 신비롭다거나 괴팍하다거나 그도 아니면 선병질에다 우울하거나 하다못해 까다롭다든지 어리숙해 보이기라도 해야 할 텐데 그러기는커녕 나는 심지어 착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보통의 가정에서 성장하여 또 하나의 보통 가정을 이루어 살고 있는 내 인생은 별다른 결손도 특징도 없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무엇보다 나의 가장 결정적인 평범함은 내가 보통 사람의 인생에서 갖춰야 할 것을 갖추어나가는 삶에, 그러니까 세속적인 가치관에 오랫동안 무구하고 성실하게 복무했다는 점에 있다. 획일적인 사회적 가치 규정과 그 틀들이 어떤 식으로 인간을 길들여 자유와 행복을 강탈해가는지를 나는 다름아닌 바로 나 자신에 대한 비난을 통해 깨달았고, 그 과정에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소설 쓰는 나'는 '일상의 나'를 부정하고 조롱하는 지점에서 태어날 수밖에 없었다.
나의 소설적 상상은 실제의 나와 되도록이면 멀리 떨어진 인물이 되어보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렇게 해서 탄생된 독하고 부도덕하고 거침없는 '소설 쓰는 나'가 내 소설의 영원한 소재이자 적(適)인 '일상 속의 나'를 가차없이 발가벗기는 것, 그것이 내가 쓰는 소설의 과정인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처럼 조롱과 부정에서 시작된 글들이 매번 모순되고 불안한 존재인 인간의 순정함을 밝히는 것으로 끝이 나곤 한다는 점이다. 그때마다 묻게 된다. 혹시 나는 내 속에 있는 악의를 변명하기 위해 소설을 쓰는 건 아닐까. 내 속에 있는 나약함과 치사함을 정당화하기 위해, 또는 내 속의 치명적 모순이 불가항력 운명이라고 항변하기 위해 쓰는 건 아닐까. 아, 그런 것 같다. 현실 속의 나는 늘 쩔쩔매고 조바심치고 움츠러들고 무슨 일이 잘못되면 먼저 '내가 뭔가 잘못한 거야' 하는 강박에 시달린다. 그러나 소설을 다 쓰고 나면 '이래도 나를 나쁘다고 할 수 있어?'라고 치받을 배짱이 생기고, 실제로 허공을 향해 눈을 한번 부라려보지 않는가. 내 소설을 읽은 사람들도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그러한 내 소설 쓰기의 도정이 가장 고스란히 반영된 것이 수상작인 '누가 꽃피는 봄날 리기다소나무 숲에 덫을 놓았을까'이다. 쓰면서 나의 유년과 작년에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을 많이 했다. 말기암으로 누워 계신 아버지 앞에서 나는 엉뚱하게도 '상 좀 받았으면' 하고 바랐다. 어린 시절처럼 상 받는 내 모습을 아버지께 보여드리고 싶었던 것인데, 지금도 그 비슷한 감회가 솟는다.
마지막으로 부족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과 한국일보에 감사드린다.
'내가 세상의 권위를 부정하려 애썼더니 세상이 나 자신을 권위로 만들어 나를 벌한다.' 이것은 내가 좋아하는 한 천재 물리학자의 말인데 가끔 나를 경계하도록 해준다. 혹시 내가 세상의 허위를 부정하려 애썼더니 세상이 나를 허위로 만들어 나를 벌하려는 것은 아닐까. 평범한 가정주부가 소설 속에서 성깔을 부릴 때 한 점 허위도 없기를 바라 마지 않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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