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12월12일 민권변호사 조영래가 폐암으로 타계했다. 43세였다. 어느 사회에서나 법률가는 선망 받는 직업이지만, 법률가의 이미지가 늘 긍정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재조(在朝)의 판·검사들은 더러 정치권력의 시녀로, 재야의 변호사들은 더러 면허를 지닌 도둑쯤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법을 정의와 관련시키는 관점은 현실을 모르는 이상주의일 수도 있겠지만, 정의가 법의 궁극적 지향점이어야 한다는 사실 또한 명확하다. 조영래는 그런 이상주의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조영래는 대구 출신이다. 법과대학 재학 시절 학생운동에 깊이 관여했다가 24세 때인 1971년 사법시험에 합격했으나, 사법연수원 재학 중 이른바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돼 구속됐다. 1년6개월간 복역한 뒤 만기 출소했지만, 곧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되자 도피 생활에 들어갔다. 6년여 동안의 힘든 도피 시절에 조영래는 대한민국 현대사에 또렷이 기록될 문건 둘을 남겼다. 하나는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부제를 단 '전태일 평전'이고, 다른 하나는 투옥 시인 김지하의 이름으로 공개된 '양심선언'이다. '양심선언'은 30대 김지하의 가장 빛나는 산문 가운데 하나로 꼽히지만, 뒷날 시인은 그 실제 필자가 수배 중의 조영래였다고 밝힌 바 있다.
조영래는 1980년 3월 수배가 해제되자 사법연수원을 마친 뒤 변호사로 개업했다. 망원동 수재사건, 대우어패럴 사건, 이경숙 사건(여성 조기정년제 철폐), 보도지침 사건 등 그가 변론을 맡은 사건들에서 조영래는 늘 우리 사회의 소외된 소수파를 옹호했다. 그가 이돈명·한승헌·황인철·이상수·박원순 등 선후배들과 함께 1988년에 조직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은 우리 사회 인권의 한 보루 노릇을 하고 있다. 고 종 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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