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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39)소설가 이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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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39)소설가 이윤기

입력
2002.12.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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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쓰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아서, 라고, 또 쓰고 싶지는 않다. 거기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면 그거 참 슬픈 일이겠다. 쓰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아서 쓴 것들이 있기는 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런 글들은 아무 울림도 지어내지 못했다. 이거 혹시 '길 가르쳐 주기'와 비슷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몇 세대를 한 곳에서 붙박이로 살아온 우리나라 시골 사람들에게 시골 길을 물으면 가르쳐주는 내용이 지극히 막연하다. 그 시골 사람에게는, 객관화하기 어려울 만큼 익숙한 풍경이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쓰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아서 쓴 작품도 비슷할 것 같다. 작품의 분위기가 작가 자신에게 너무 낯익은 풍경일 뿐만 아니라 거기에 투영되어 있는 작가의 미의식은 편애의 산물일 가능성조차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글들을 많이 썼다. 그런 글들을 쓰고 나면 몸(존재라고는 하지 않겠다)이 가벼워지고는 했다. 나는 가사 좋은 유행가 부르기를 지금도 좋아한다. 그런 노래 몇 곡 부르고 나면 몸이 많이 가벼워진다.문학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인생이 그렇게 풀렸다. 내 나이 이제 겨우 만으로 쉰 다섯인데 내 인생은 일제시대 것 같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한문을 조금 배웠다. 한문으로 된 어린이 읽을 거리를 여러 권 읽었다. 한글로 된 딱지본 소설도 여러 권 읽었다. 외운 것도 여러 권 되었다. 아이고, 글이란 이렇게 좋은 것이구나 싶었다. 그런데 초등학교 시절에 강력한 라이벌이 나타났다. 만화였다. 김종래 박기당 김경언 산호 같은 작가의 만화를 열심히 읽었다. 김경언의 만화에 나오던 칠성이, 산호의 만화에 나오던 라이파이는 지금도 그릴 줄 안다. 글 쓰는 시늉을 할 것인가, 만화 그리는 시늉을 할 것이냐? 초등학교 6학년 때 교내 백일장에서 장원을 한 번 했다. 그림 그리기로 상을 탄 적은 한번도 없다. 그림에서는 내 인생이 밀려났다.

중학교 1학년 때 꼬마 가정교사가 되어 벌써 남의 집살이를 했다. 내 몸을 붙여준 집이 부잣집이어서 책이 많았다. 각각 백 권씩으로 이루어져 있는 세계명작전집, 세계위인전집을 읽었다. 독서에 관한 한, 나는 딱지본 소설에서 수십 년을 훌쩍 건너 뛰어 바로 학원사 학생 문고 쪽으로 한달음에 이른, 이상한 경험의 소유자다. 아, 글이라는 게 세상을 이렇게 넓게 살도록 하는구나. 글 쪽으로 가파르게 기울었다. 중학교 2학년 때는 학교 도서관 사서 노릇을 했다. 책의 바다에 빠져 살았다. 아주 가까운 친구가 있었다. 시를 써서 교환했다. 밤새 시를 써서 봉투에 넣고, 이걸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서로 상대의 교복 주머니에 슬그머니 찔러 넣어주는 매우 수상한 짓을 2년 내내 했다. 친구는 정말 시를 잘 썼다. 나는 자꾸 베끼기만 했다. 친구는 나에게, 야, 미당(未堂) 냄새 너무 난다, 라고 하거나, 이어령보다 더 건방져, 라고 하는 일이 잦았다. 미당 선생의 시와 이어령 선생의, 꼭 무슨 선언문 같은 산문이 거의 맹독 수준으로 내 정신에 번졌다. 독을 빼는데 오래 걸렸다. 중학교 2학년 겨울부터 일본어를 독학했다. '어느날 토끼와 거북이가 경주를 했습니다', 이것이 내가 난생 처음으로 외운 일본어 문장이다. 일본어 공부를 계속해서, 많은 일본 작가들 작품을 일본어로 읽었다. 소설가로는 다자이 오사무, 미시마 유키오, 시인으로는 이시카와 다쿠보쿠가 좋았다. 이시카와 타쿠보쿠 체험은 나에게 '미리 죽어두는 죽음'이었다. 이시카와의 짧은 시를 지금도 여러 수 외고 있다. 영어로 된 시도 읽고 소설도 읽었다. 이상한 일도 다 있지. 영어로 외운 것은 지금도 영어로 기억하는데 일본어로 외운 것은 우리 말로만 기억한다. 내 머리 속에 자동 번역 장치가 들어 있었던 모양인가. 다행히도 내 인생에 고등학교 시절은 삼개월밖에 없다. 노동과 고독과 음악과 책이 있을 뿐이다. 이 때의 장서량이 천 권쯤, 클래식 원판 레코드가 한 400장쯤 되었는데, 산비탈 마을에 살 때, 그 때 기르던 염소 몇 마리와 함께 산사태에 파묻혔다.

대학 입학 자격 검정고시 준비하면서 단편소설을 한 편 썼다. 쓸 때만 행복했다. 약속 장소를 서로 오인하는 바람에 평생 어긋나서 살아가게 될 처녀총각 이야기. 비슷한 일이 내게 있었다. 쓰고 나니 몸이 많이 가벼워졌다. 입대했다. 이등병 시절에도 단편소설을 두 편 썼다. '비상도로'가 그 중의 하나. 종교는 보험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어서 쓴 이야기. 베트남 가서도 몇 편을 썼다. '하얀 헬리콥터'와 '손님'. 정말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몸 좀 가벼워지고 싶어서 쓴 이야기들이다. 전자는 데뷔작이 되었고, 후자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는데 뒷날 문학평론가 김정란 교수가 극찬해주어서 행복했다. 군대에 있을 때는 군대가 너무 지겨워서 제대하면 검정 고무신 장수를 하더라도 가게 문 열고 싶을 때 열고 닫고 싶을 때 닫겠노라고 결심했다. 나는 그 때 휴대용 직업을 갖겠노라고 굳게 결심했다. 그런데 소설가는 되고 싶은데, 응모라는 절차를 도무지 소화해낼 수 없었다. 도둑질하는 사람처럼 남의 눈치 슬슬 보면서 신문사에 투고했다. 신춘문예에 소설이 입선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날, 먹은 것을 토했다. 어 뜨거라 싶어서 외국 문학과 인문학 번역에 뛰어들어 한 20년을 견디었다. 그런데 역시 아니었다. 그래서 또 썼다. 백 점 짜리 시험지 들키는 기분으로(뒷날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지만) 15년 전에 첫 창작집 내면서, 후기에 이렇게 썼다.

'옛날 조(趙)나라 서울인 한단(邯鄲) 사람들 걸음걸이는 보기 좋기로 소문나 있었던 모양인데, 어느 실없는 연(燕) 나라 사람이, 그 걸음걸이를 배우러 갔다가 제대로 배우는 것은 고사하고 제 연나라 걸음걸이마저 잊어 버려 하는 수없이 기어서 돌아왔다… 이런 옛 이야기가 있다. 소설 쓰는 일을 걸음걸이에 견주면 내 보법이 그짝이다.'

이렇게 쓰고도 문제는 '보법'이라는 것을 나는 알지 못했다. 1993년 미국에서 결심했다.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에 이름 붙여 보기(Naming the unnamable)'로 결심했다. '보법'을 까맣게 잊은 채 원고지 육천장을 썼지만 역시 생멱 따는 소리만 낸 것으로 판명되었다. 1995년부터는 중단편에 매달렸다. 초심의 보법으로 돌아가야 하는데도, 소설가는 시대의 스승이 되어 세상을 향하여 뭔가를 가르치는 소리를 마구 해야 하는 줄 알았음에 분명하다. 한 문학평론가부터 따뜻한 비아냥을 집중적으로 많이 받았다.

"당신의 소설에 어리석은 사람은 하나도 없군요!"

'(배우는 것도) 소설 읽는 재미의 하나지만 배우는 일이 잦은 소설은 아무래도 좀 옛날 소설 같다.'

'누군가 설법을 시도하고 소설가가 그 설법을 대필하고 있는 것일까?'

덕분에 어렴풋이 깨닫는다. 아무래도 문자로는 안 될(不立文字) 것 같다. 문자로써 되게 하려면, 문자로써는 다만 건드리고 지나가기만 해야 할 것 같다. 나에게 이 세상 삶의 현상은 거대한 원어 텍스트, 내가 부리는 언어는 '원어를 고스란히 재생시킬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난 역어'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나의 선조적 언어로써 원에 가까운 진리의 세계를 그려낼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나는 단지 한 점만을 건드리고 지나갈 수 있을 뿐이다. 나를 비아냥거리던 고수가 이렇게 건드리고 지나가듯이.

'1957년 10월 9일 청명한 날 아침. 비원의 큰 대문 앞 광장에 중학교 교복차림의 한 소녀가 노란 탱자 한 알을 손에 들고 혼자 서 있다. 텅 빈 광장의 너무 밝은 아침햇살 속에 오히려 빛의 안개가 서린 듯하여 나는 그 소녀의 얼굴을 잘 보지 못한다. 그의 이름도 모른다. 열 다섯 살의 나, 소녀를 등 뒤에 남겨두고 비원의 뜰 안으로 들어간다. 그 뿐이다. 그러나 그날 아침의 빛, 텅 빈 광장, 투명한 공기, 큰 대문의 소슬한 추녀와 더불어 그 소녀의 모습은 내 마음속에다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 하나를 만들어놓았다. 그 풍경은 나만의 것이다. 소녀 자신도 그 풍경을 보지는 못했다. 그 때 이후 문학은 나의 축복이다.' 김화영 저, '한눈팔기와 글쓰기'

● 연보

1947년 경북 군위 출생 성결교신학대 중퇴 197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하얀 헬리콥터' 입선 소설집 '하얀 헬리콥터' '나비넥타이' '두물머리' 장편소설 '하늘의 문' '사랑의 종자' '햇빛과 달빛' '뿌리와 날개' '나무가 기도하는 집' '그리운 흔적' 신화연구서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길 위에서 듣는 그리스 로마 신화' 산문집 '에세이 온 아메리카' '무지개와 프리즘' '이윤기가 건너는 강' 번역서 '그리스인 조르바' '장미의 이름' '변신 이야기' 등 1991∼96년 미시간주립대 국제대학 초빙연구원(종교사)·1997∼2000년 사회과학대학 객원교수(비교문화) 동인문학상(1998) 대산문학상(2000)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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