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반미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대다수 언론은 반미시위가 한미관계의 악화 내지는 주한미군 철수로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표시하고 있다. 이 가운데 현저하게 빠져있는 부분은 상황인식과 처리에 관한 국내 시스템과 과정의 문제다. 일부에서 이미 지적했지만 우리 국민을 분노케 하는 것은 미국 못지않게 안이한 상황인식에 빠져 있는 우리 정부다.안이한 인식은 대통령으로부터 시작하여 관련 부서에 이르기까지 예외없이 팽배해 있다. 9월 6일 외신기자 초청 오찬에서 김 대통령은 "반미감정 문제는 일부 그런 경향이 있으나 절대 다수는 그렇지 않다"고 했다. 사태가 상당히 진전된 12월 10일에는 SOFA 개선 방안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쪽으로 변했다. 이를 반영하듯 9월 16일 외무부 당국자의 논평은 주한 미군과 학생들간의 충돌사태 자체에 대한 우려만 표명했을 뿐 한국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 파악의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또한 이에 앞서 외무부는 미국 측과 SOFA합동위 차원에서 사고 재발방지에 대한 협의를 한 바 있는데, 여기서도 한국인의 정서가 전달되었다는 내용을 찾아 볼 수 없고, 기계적이고 기술적인 내용만 가득 차 있다.
시위가 확산되고 특히 조지 W부시 대통령의 간접사과가 있은 후에도 상황이 호전되지 않자 4일 국무총리 주재로 관계장관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의 결과 반미감정이 한미관계에 미칠 영향에 대한 우려와 함께 앞으로 SOFA 운영상의 개선점 및 사태재발 방지책이 발표됐다. 흥미로운 것은 이전에는 대통령, 외무부, 국방부 등 개별 조직 차원에서 언급되던 것이 국무총리 포함 12개 부서가 모두 참여한 가운데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이후 11일 정부의 '여중생 사망사건'에 관한 보도자료에서 정부는 국민정서를 반영하여 "정부도 국민과 똑같은 심정"이라고 발표했다. 또한 국무총리실에 13개 부처로 구성된 대책반을 마련하여 시민단체들과의 대화를 서두르고 있다.
정부의 상황인식을 보여주는 일련의 대응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우선 이번 반미시위에 대한 인식의 착오가 북미관계로 인해 지나치게 미국을 의식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만약 그렇다면 이는 한국 외교의 평면적 사고를 드러내는 것이다. 양국의 외교관계는 복잡한 전략 속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어느 한 변수에 집착하는 경우 오히려 손실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어느 한 부처도 처음부터 상황의 심각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 배경에는 한미관계의 구태의연한 관성과, 어느 한 부서도 문제를 총체적으로 파악하는 위치와 능력을 갖지 못한 구조적 한계가 자리잡고 있다. 이는 급기야 13개 관련 부처로 이루어진 대책반이 국무총리실에 마련된 것만 봐도 알 수가 있다.
민주화와 세계화 이후 우리 외교는 심각한 도전을 받아 왔다. 그 중 하나가 기존의 외교 유형에 도전을 야기하는 부서간의 조정 문제다. 또 다른 하나는 국민정서의 정확한 파악이다. 우루과이라운드 협상 등에서 농수산부와 외교통상부 사이에 의견조율이 잘 이루어 지지 않았던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냉전구도 속에서 단순 외교에 익숙했던 한국 외교는 보다 복잡한 문제의 해결에 필요한 조직간 조정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번 SOFA 개정을 둘러싼 반미운동에 대한 정부의 대응과정은 편편히 분산된 정부 조직들이 종합적 대책이 필요한 상황에 직면하여 발빠른 대처를 하지 못했음을 보여 주었다. 이번 사건은 단순히 주한미군 문제를 벗어나, 민주화 과정의 한국 사회가 새로운 국제적 지위를 요구하는 에너지를 어떻게 전략적으로 활용할 것인가 하는 과제를 던지고 있다. 사후약방문 격으로 성급히 마련한 대책만으로 상황을 넘기려 하지 말고 이를 계기로 새로운 도전에 대처하기 위한 제도적 개선을 서둘러야 할 것이다.
/서울대 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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