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수빅만의 시가지 풍경은 참 낯이 익었습니다. 성냥갑을 눕혀놓고 지붕만 씌운것 같은 건물의 형태도, 기름냄새가 훅 풍기는 도로의 분위기도, 그리고 구석구석 철망이 드리워진 금단구역에 대한 인상도 그랬습니다. 약 10년전까지만 해도 미 해군이 사용하던 폐쇄적인 공간이었으니까요. 이런 분위기에 어색함을 느끼지 않는 민족은 세상에 몇이나 될까. 묘한 감상에 젖었습니다.수빅만에서 미군이 떠난 지 이제 10년. 이후 필리핀 정부는 이 곳을 자유무역도시로 지정하고 외국인을 위한 대규모 리조트 단지를 조성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관리는 철저합니다. 과거에는 철조망 안에 들어있어 개발이 완전히 금지됐고, 이제는 개발은 하되 가능한 한 난개발을 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가지는 옛 모습을 거의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뒤를 돌아 바다를 바라보면 분위기가 많이 다릅니다. 과거에는 수백척의 우람한 군함이 도열해있고, 그 군함이 내뿜는 연기와 소리가 진동했을 것입니다. 물 위에는 기름이 검게 덮여 있었겠죠. 그러나 이제는 그런 모습을 상상하기 힘듭니다, 정박시설이 유난히 큰 필리핀의 보통 바닷가일 뿐입니다, 참 맑습니다. 공기도 물도 하늘도 모두 맑습니다. 청정한 기운을 느낄 수 있습니다. 원래의 수빅만은 그랬을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우리의 모습을 생각했습니다. 나라 차원에서 미국과의 관계변화를 모색하고 있는 마당에 새삼스럽게 미군부대를 들먹거릴 생각은 없습니다.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이 땅에는 미군시설 몇 배의 철조망으로 금이 그어진 땅이 있습니다. 특히 해안선을 빙돈다면 아마 절반 이상이 군사시설일것입니다.
그 철조망을 싹 들어낸다면 어떨까요. 우리는 세계에서도 몇 손 안에 드는 아름다운 해안을 가진 나라가 될 것입니다. 여름에 좁은 해변에서 복닥거릴 일도 없을 것이고, 많은 외국인들이 아름다운 해변을 찾아 우리를 찾겠지요.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하냐고요?
군사시설이 걷혀진 곳, 그래서 아름다움을 되찾아가는 수빅만을 보며 아직은 꿈 같은 엉뚱한 생각을 해봤습니다.
권오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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