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여러 종류의 바람(風)이 한국정치에 큰 여파를 미쳤다. 북풍(北風), 병풍(兵風), 세풍(稅風), 최근에는 단풍(單風)까지 수많은 바람이 불었다. 바람이라는 말에 함축되어 있듯이, 어떤 사건이나 인물이 단기에 정국 풍향을 바꿔놓거나 정치 과정에 갑작스러운 변화를 가져올 때 '∼풍'이라는 표현을 쓴다. 전에 비해 요즘 언론인이나 정당 대변인의 조어(造語) 능력이 나아졌기 때문에 '풍' 시리즈가 연속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각종 정치바람이 과거보다 근래에 많이 불고 있다. 그만큼 급작스러운 변화가 자주 생겨 정국을 예측하기 힘들어졌다.이는 우리 나라만의 현상이 아니다. 미국을 보자. 금년 11월 중간선거를 불과 몇 주 남긴 시점에서 여론조사는 민주당의 우위를 점쳤다. 여론조사뿐 아니라 사회경제 상황도 민주당에 유리했다. 비록 지난해 9·11 테러 이후 급상승한 공화당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인기는 여전히 상당했지만, 중간선거에서 대통령 당이 의석을 잃는 전통을 깨기에는 역부족일 것이라고 예측되었다. 그러나 바람이 불었다. 부시가 이라크에 대한 비난의 강도를 높이고 무력 행동을 공언하자 많은 미국 유권자가 9·11의 악몽을 되살리며 애국주의적 분위기에 휩쓸렸다. 그 결과로 공화당이 예상과 달리 큰 승리를 거두었음은 주지하는 바이다.
왜 정치바람이 자주 불까. 탈산업화라는 전환기적 사회 변화에서 근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사회가 쉼 없이 빠른 속도로 변하고 사회 이익이 파편처럼 분화하고 대중이 모래알처럼 원자화하고 있다. 이에 따라 기존의 사회 구도, 정치 구도가 침식되고 있다. 사회 공감대도 낮아지고 있다. 자연히 시민의 생각도 정형화 고착화를 거부하고 외부 자극에 의해 쉽게 바뀌게 된다. 바람이 효력을 발휘하기 좋은 조건이 형성된 것이다. 특히 한국의 경우, 민주 대 비민주 구도 및 지역주의 구도가 약화하며 이를 대체할 구도가 아직 자리잡지 않았기 때문에 바람의 효력이 더 크다.
매스 미디어는 바람이 널리 그리고 빠르게 퍼지도록 촉매제 역할을 한다. 신문뿐 아니라 TV, 그리고 최근에는 인터넷까지 동원되며 엄청난 파급효과를 낸다. 특히 인터넷은 신문과 TV와는 달리 쌍방향 의사 소통, 시민의 직접참여를 수반하므로 정치바람의 확산에 결정적 공헌을 한다.
탈산업화와 매스 미디어가 주요 원인이므로 정치바람의 잦은 등장은 필연적인 시대 흐름일지 모른다. 긍정적 효과를 기대할 수도 있다. 바람은 기존의 낡고 현상 유지적인 틀과 판을 깨고 정치 구도에 변혁을 가져오는 힘을 지닌다. 바람이 없다면 정치 변화는 표피적, 요식적 수준에 머물기 쉽다.
그러나 부정적 측면도 간과해선 안 된다. 바람은 정치의 안정적 제도화를 해치는 경향이 있다. 간혹 바람이 불어 낡은 것을 쓸어간다면 좋겠지만, 너무 자주 불어 정치 과정의 틀을 계속 무너뜨려서도 곤란하다. 정치가 제도화하지 못할 때 극소수 정치인이 자의적으로 정치를 주도할 위험성이 극대화한다. 아울러 제도의 틀 속에서 운용의 미를 찾는 노력도 할 수 없게 된다.
정치바람의 보다 더 큰 폐해는 이상적 민주시민의 상(像)을 깨뜨린다는 데에 있다. 바람이 위력을 발휘할 때 우리는 이성보다 감정에 이끌리고, 개인적 판단보다는 집단적 분위기의 포로가 된다. 이런 속에서 바람은 선동정치를 촉발시키고 우리 국민은 더욱 감정적, 피동적 존재로 전락한다.
결론은 균형이다. 적당한 바람은 썩고 뿌리가 흔들거리는 고목을 날려버리지만, 지나치면 어린 꽃까지 뿌리가 뽑힐 수 있다. 바람은 또한 꽃가루를 널리 퍼뜨리지만, 모든 것을 갈대처럼 집단으로 갈피를 못 잡게 흔들리게 한다는 점을 인지해야 한다.
임 성 호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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