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시나위보다 8개월 뒤 부활이 '희야'로 데뷔했다. 김태원(기타) 이태윤(베이스) 황태순(드럼) 이지웅(기타) 이승철(보컬)로 짜여진 부활은 시나위, 백두산과 더불어 그 무렵 붐을 이룬 젊은 헤비 메탈 밴드의 선두주자로 꼽혔다.하지만 부활은 엄밀하게 말하면 헤비 메탈 밴드는 아니었다. 부활의 전신인 디 엔드 때부터 현재까지 17년 동안 부활을 이끌고 있는 김태원(37)은 "당시 록의 주류가 헤비 메탈이긴 했지만 우리들의 지향은 예나 지금이나 멜로디가 있는 록"이라고 말한다.
확실히 부활은 여느 록 밴드와 뚜렷하게 구분되는 음악을 했다. 귀에 익은 70년대식 록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시나위의 정통 헤비 메탈처럼 당대에 유행하는 록도 아니었다. 음악은 어두우면서도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삽입한 '인형의 꿈'처럼 화려한 느낌이 났고 힘보다는 감상이 앞섰다. 록 밴드로서는 드물게 자작곡이 아니라 작곡가 양홍섭에게 받은 타이틀 곡 '희야'는 록이라기보다는발라드에 가까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승철의 보컬은 록 보컬리스트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부드럽고 윤기가 흘러 넘쳤다. 이승철(36)은 "어려서 록을 들을 때도 블루스 계열을 많이 들었고 부활 이전에 헤비 메탈 밴드에서 노래할 때도 발라드를 훨씬 더 잘했다"고 말한다. 원년 보컬이던 김종서가 군에 입대하는 바람에 보컬을 찾고 있던 김태원이 딥 퍼플의 '솔저 오브 포춘'으로 오디션을 본 동네 후배 이승철을 보고 망설이지않고 선택한 것도 그의 음색 때문이었다. 김태원의 기타와 이승철의 보컬은 묘한 울림을 전하며 록을 듣지 않던 사람들까지 끌어 당겼다.
활동 방식도 이제까지의 록 밴드와는 달랐다. 방송을 마다하기는커녕 오히려 카메라 앞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발라드식 멜로디에 애절한 보컬, 그리고 왕성한 방송 활동은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 이후 생겨난 오빠 부대를 사로잡았다. 이승철이 노래의 첫 마디인 '희야'를 부르기만 하면 소녀팬들의 비명이 어김없이 터져 나왔다. 음반은 1집과 '비와 당신의 이야기'가 수록된 2집(86)이 연속 빅 히트를 기록했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부활의 음악은 록이 아니다"라며 비난했다.
이에 대해 김태원은 "한국적 록에 대한 나름대로의 고민이었다"고 말한다. "한국인의 정서를 무시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음악은 어떤 음악이냐보다는 들려지고 들으면 되는 것"이라는 이승철의 단순하고 편한 논리도 한몫 거든다. 두 사람은 지금도 "록, 록 밴드에 대한 규범이 없어야 하고 누군가는 나서서 연예인으로서 록에 대한 이미지, 인식부터 심어주어야 한다"고 믿는다. 확실히 부활은 80년대 중반 그런 역할을 했다.
하지만 부활이 터놓은 대중적인 록 밴드의 길은 이어지지 못했다. 88년 밤무대 활동 여부를 놓고 의견이 엇갈린 이승철과 김태원이 결별했고 록은 90년대 들어 댄스에 밀려 하루아침에 몰락했다. 이후 수많은 록 밴드 출신들은 록을 하지 못하고 대신 '록 발라드'라는 한국에만 존재하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 우회해야만했다. 막막한 앞길에 부활의 대중적 성공이 모범답안이 됐음을 물론이다. 부활은 80년대 중반 한국 록의 부흥을 가장 화려하게 상징하는 밴드이기도 하지만 이후 한국 록의 기형적 구도에 '본의 아니게' 기여한 팀이기도 하다.
/김지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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