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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668)카라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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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668)카라한

입력
2002.12.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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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12월10일 옛 소련 외교관 레프 카라한이 총살됐다. 48세였다. 카라한의 죽음은 1930년대 후반 스탈린이 세칭 '모스크바 재판'을 통해 잔혹하게 일으킨 숙청 바람의 작은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카라한은 외무인민위원 대리 시절 중국에 보낸 두 문서 덕분에 20세기 국제정치사가 생략할 수 없는 이름이 되었다.1919년 7월25일의 '중국 인민과 남북 두 중국 정부에 보내는 제언'과 1920년 9월27일의 '중국외교부에 대한 각서'는 모두 카라한 명의로 된 것이어서, 이 두 문서를 뭉뚱그려 카라한 선언이라고 부른다. 제1차 선언은 제정 러시아가 중국에 강요한 일체의 불평등 조약을 무효화한다는 내용이고, 제2차 선언은 제1차 선언을 조문화한 것이다. 중국인들은 당연히 카라한 선언을 크게 환영했다. 이 선언은 근대 중국 최초의 평등 조약인 1924년 중소 협정의 바탕이 되었다. 카라한 선언을 통해 혁명 이후의 러시아 곧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은 제 도덕성을 전세계에 과시한 셈이다.

불평등 조약은 강대국이 약소국에 대해 준(準)종속적 지위를 강제하는 조약이다. 중국 근대사에서는 1842년 8월 아편전쟁을 마무리하며 영국이 청(淸)에 강요한 난징(南京)조약이 대표적이다. 그 자체가 부도덕하기 짝이 없었던 아편전쟁의 결과로, 영국은 중국으로부터 홍콩을 빼앗고 광저우(廣州)와 상하이(上海)를 비롯한 다섯 개 항구의 개항과 거액의 배상금을 강요하는 외에, 개항장의 영사 재판권을 포함한 여러 특권들을 얻어냈다. 뒤이어 미국과 프랑스도 이와 비슷한 불평등 조약을 중국에 강요해 영국과 똑같은 특권들을 손에 넣었다. 조국의 반(半)식민지 상태에 분노하던 중국인 다수에게 카라한 선언은 용공(容共)의 동력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고 종 석/편집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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