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어제 딸의 집에 갔다가 고1 외손녀 때문에 딸과 다투고 와서 뒤숭숭해 의논드립니다. 올 봄 경쟁이 심한 고등학교에 입학한 외손녀는 살이 빠져 큰 키에도 38㎏밖에 되지 않습니다. 알고보니, 몇 달 전부터 위장장애로 아이스크림 이외 다른 음식을 통 먹지 못한답니다. 종합병원 내과에 다녔는데 병원에서는 정밀검사로는 이상을 발견치 못하고, '거식증'일지 모르니 신경정신과 진찰을 권고하더랍니다. 딸은 아이스크림만 먹지않으면 될 것이라며 외손녀를 나무랐고, 저는 딸에게 의사 말을 들으라고 야단을 쳐 모녀간에 얼굴을 붉혔습니다. (서울 성북동 안씨)
답>외손녀를 두고 딸과 얼굴을 붉히셨으니 씁쓸하시겠죠. 그러나 옳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외손녀는 거식증일 확률이 높습니다. 거식증은 15∼25세 여자에게 발병하기 쉬운 마음의 병입니다. 적게 먹거나 굶어서 살을 빼는 병인데, 요사이 날씬한 것이 미인이라는 사회풍조가 있어 병인 줄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속으로는 늘 음식을 생각해 밤에 몰래 폭식을 하고, 죄책감에 토해버리는 일도 간혹 있지요. 가슴이 밋밋해지고, 생리도 없어집니다. 방치하면 전체 중 7%는 피골이 상접하여 영양부족과 심신쇠약으로 사망합니다. 이 병은 자신감 및 충족감 부족에 시달리면서도 겉으로는 남들에게 '완전무결'하다는 소리를 들으려는 데서 옵니다. 부모는 대부분 지식인 중상류층으로 자녀교육에 관심을 쏟습니다마는, 늘 '일류, 성공, 미모'에 중점을 두어 자식 의사를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경우가 많지요. 그러니 자식도 몸 하나만은 자기 마음대로 하겠다고 덤비는, 일종의 독립운동을 하게됩니다.
평소 거식증 환자는 어머니를 두려워하면서도, 어머니에게 비판적이고 경쟁적인 면을 지니는 반면 아버지와는 다소 애틋한 관계에 있습니다. 때문에 성숙하기를 거부하고 어린 아이 몸 상태에서 사랑을 받고자 하는 잠재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먼저 중년의 따님을 다독이면서 설득하고, 잘 되지 않으면 사위에게도 말해 외손녀를 전문가에게 데려가도록 하십시오. 댁과 따님의 전통을 이어나갈 여자 하나를 살리는 길을 용감하게 택하시는 것이 주눅들어 딸 눈치만 살피시는 것보다 낫습니다.
/서울대 의대 신경정신과 명예교수 dycho@dych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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